수다쟁이에 ‘허당’, 그러나 마음은 따뜻함으로 가득

권은중의 나이 쉰에 떠난 이탈리아 요리 유학기 ⑰ 이탈리아 사람들을 흉보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

등록 : 2019-11-1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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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기로 치면 세계 챔피언감

젊은 남자들도 ‘과묵’과 인연 없고

시속 80㎞ 이상 고속버스 안에서도

운전기사는 늘 손님과 수다 떨어

시간개념도 ‘허당’, 공산품도 ‘허당’

그러나 말해보면 독일 깍쟁이와 달리

금세 친구라 부르며 살갑게 다가와

시간 지날수록 이탈리아가 좋아져


“제 눈의 들보는 안 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본다”는 말이 있다. 사실 내 눈의 들보는 안 보여도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탈리아에서 8개월을 살았고 거기다 매사 삐딱하게 보는 게 직업인 기자를 20년 했으니 내 눈에 이탈리아 사람들의 허물이 얼마나 잘 보였겠는가?

하지만 꾹 참았다. 난 이탈리아 문화를 배우러 온 사람이니까 이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나를 설득했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 사귄 친구들과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 관계자들이 내 페이스북 친구(페친)니까 조심스럽기도 했다(심지어 인턴을 했던 레스토랑의 셰프와 스태프도 페친이다). 하지만 이제 인턴도 그만뒀고 곧 한국으로 돌아갈 ‘자유의 몸’. 지금쯤이면 이탈리아 사람 흉을 봐도 괜찮을 듯싶다.

먼저 말하고 싶은 건 이탈리아 사람들의 수다 본능이다. 이탈리아인들은 떠들기 세계 챔피언감이다. 특히 놀라웠던 건 처음 본 사람들하고도 몇 시간을 떠든다는 거다. 심지어 과묵하기 마련인 젊은 남자들도 그랬다.

그들의 수다 본능은 버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인턴으로 있던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아 북서부의 산업도시 토리노 시내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버스에는 노인이 많았다. 그런데 맨 앞줄에 앉은 노인들은 항상 운전기사와 수다를 나누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타면서부터 내릴 때까지 운전석 옆 계단에 서서 가면서 수다를 떨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기사들은 이 수다에 참여하지 않고 정보 제공자이거나 감독자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기사들은 차 안이 너무 시끄럽다 싶으면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기사가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대화에 적극 참여한다. 한번은 운전기사 한 명과 앞에 앉은 승객 네 명이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가는 것도 봤다.

에너지가 넘치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압권이었다. 지난 10월 시칠리아 동쪽 끝 카타니아에서 서쪽 끝 팔레르모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탔는데 젊은 여자 둘이 카타니아 공항에서 탔다. 비행기 여행을 한 듯 짐이 많아서 두 여자는 운전석 바로 뒤의 맨 앞줄과 그다음 줄에 각각 앉았다. 뒷줄 여자는 금세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그런데 맨 앞줄에 앉은 여자가 운전기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해 무려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들었다. 여기 바로 옆줄의 노인 두 명도 동참했다. 시속 80㎞ 이상 달리는 고속버스에서 대화를 나눠야 하기 때문에 이들은 목청을 높였다. 노인 둘의 좌석 바로 뒤에 앉은 나에게는 참 고역이었다. 심지어 이 젊은 여자는 가끔 노래도 한두 소절씩 불렀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의 에너지가 행동보다는 말에 집중된다는 점은 문제다. 내가 다니던 요리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 수업은 오전 9시에 시작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있던 이탈리아 언어 수업은 8시에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왜 8시에 하느냐”고 항의했다. 학교 쪽은 요리 실습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업 전에라도 시간을 내서 언어 수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한술 더 떠 학교는 이탈리아 전국이 다 쉬는 국경일에도 수업했다(부활절만 쉬었다). 토요일에도 늦게까지 수업하는 날이 많았다. ‘너희들은 요리를 배우러 왔으니 쉬는 날도 열심히 일하라’는 일종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언어 강사는 지각이 잦았고 아예 안 온 날도 있었다. 앞에서는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지만 실제는 실수투성이였던 셈이다. 그래서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의 특징을 내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허당’이다.

토리노 한 대학의 화장실. 이탈리아에는 남녀 화장실이 한 공간에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공중화장실은 변기 뚜껑과 시트가 없어 난감할 때가 많다.

이 ‘허당’스러운 사람들이 만든 물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인 게 잠금장치였다. 학교 화장실의 문은 어떻게 해도 잘 잠기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 이 문이 잠기는데 그때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아예 화장실 문을 잠그지 않고 사용했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끔 수업 중에 비상벨이 울린다. 화재 경보가 아니었다. 문을 닫고 화장실에 들어간 여학생들이 갇혀서 나올 수가 없자 여자화장실 안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는 탓이었다. 우리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 공산품의 허상을 거의 매일 경험했던 셈이다. 터미널이나 기차역의 화장실 역시 비슷하다. 문이 안 잠겼다. 일부 여성은 앞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아줘야 했다. 심지어 역의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었고 변기 시트도 뚜껑도 없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이탈리아 제품의 허술함은 말하려면 끝이 없다. 가령 우리의 멸치젓과 비슷한 이탈리아 안초비 병이 옆으로 쓰러지면 액젓이 다 샌다. 병뚜껑이 완벽하게 밀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랩은 너무 얇아서 종전에 썼던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아프리카 같은 저개발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만든 랩처럼 느껴진다. 양말이 이탈리아 제품이라고 샀는데 두세 달을 신으면 스스로 해어져서 버려야 한다. 3월에 한국에서 사온 양말은 아직도 신고 있는데 말이다. 기차표에 좌석이 적혀 있는데 실제 타보면 이 번호의 좌석이 없기 일쑤다. 그래서 아무 데나 앉아 있어도 차장이 뭐라고 하지 않는다. “여긴 이탈리아야”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문 등록을 위해 방문한 아스티 경찰서에서는 나에게 아침 8시40분쯤 오라고 소환장 비슷한 거까지 만들어서 학교를 통해 나에게 알렸다. 하루 전날 아스티의 역전 호텔에서 묵으면서까지 아침 일찍 경찰서에 갔지만 내가 경찰 관계자를 만나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한 건 11시였다. 별것도 아닌 서류를 작성하고 지문을 찍는 데 걸린 시간이 한 시간가량이었다. 시간관념이나 업무 효율성이 제로였다. 이를 증명하듯이 경찰서 1층에 있는 벽시계 세 개는 모두 멈춰 있었다. 또 이탈리아 기차가 제시간에 안 오는 건 아주 유명하다. 작은 역에는 시계가 멈춰 있거나 아예 시계가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빈틈만 있으면 차들이 전속력으로 달린다. 그래도 신기한 건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선다. 오토바이도 마찬가지다.

일은 이렇게 답답하게 처리하면서 운전은 참 미친 듯이 한다. 어디 빈틈이라도 있으면 미친 듯이 파고든다. 골목길에서도 참 정신없이 달린다. 시내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나라 시내버스만 거친 줄 알았는데 이탈리아 시내버스 운전도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신호가 바뀌면 칼같이 서는 건 참 신통하다(심지어 오토바이도 횡단보도 앞에서 딱 멈춘다).

놀 때도 참 잘 논다. 인턴으로 일하던 레스토랑에서는 손님들이 자정 넘어서까지 레스토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결혼 피로연이라도 있으면 새벽 3시까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췄다. 이런 점은 한국 사람과 비슷한데 우리는 노래방이나 특정 장소에서 노는 반면 이들은 그냥 레스토랑 앞마당에서 이러고 논다. 진짜 한 수 위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의 수다스러움과 ‘허당’스러움은 인간관계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북부 사람은 얼핏 보면 독일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다. 금발의 큰 키에 냉정해 보이는 눈빛은 게르만족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들과 말을 나누고 친해지면 금세 표정이 바뀐다. 이들은 영국이나 독일 사람들처럼 깍쟁이가 아니었다.

시칠리아의 한 정육점 주인이 소고기 내장과 채소를 오일과 식초에 버무린 지역 요리를 시식해보라고 권하고 있다. 남부는 음식도 맛있고 음식 인심도 후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개방성은 남부로 내려갈수록 좋아진다. 남부 사람들과는 금세 친해졌다. 식당이나 카페는 물론이고 슈퍼마켓이나 옷집 종업원들도 단순한 정보 제공 이상의 친근감을 표시한다. 그리고 빵집이나 살루미(이탈리안 햄) 가게에서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잘라서 떼어주는 것도 남부에서 처음 경험했다. 팔레르모 숙소 근처의 살루미 가게 아저씨는 팔레르모에 있을 때 나를 ‘아미코’(친구)라고 불렀다. 덕분에 살루미나 치즈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참 많이도 사먹었다. 시칠리아 올리브 농장의 방앗간 아저씨는 방앗간 구경을 갔던 나에게 갓 짠 올리브 오일을 한 통 그냥 주기도 했다.

시칠리아의 한 올리브 방앗간 모습.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이렇게 갓 짠 올리브유 1리터를 방앗간을 구경 온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른 유럽 국가 사람들과 달리 정이 있다”는 말을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종종 들었다. 실제 이탈리아 친구를 몇 명 사귀었는데 그들은 사려 깊게 나를 챙겨주었다. 내가 토리노를 떠나 이탈리아 각지를 여행한다고 하니까 집으로 초대해 환송식을 열어주는가 하면 이탈리아 각지에 살고 있는 자기 친구나 가족을 연결해주었다. 내가 인턴으로 일하던 레스토랑 셰프는 내가 시칠리아로 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현지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동료 셰프들을 소개해주었다. ‘허당’스럽지만 속 깊은 사람들.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리아가 좋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사진 권은중 <음식 경제사>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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