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계곡소리·새소리 닮은 악기들이 가득

서울의 작은 박물관 ⑯ 서초구 서초동 국악박물관

등록 : 2019-11-0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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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로 만든 ‘생황’, 흙 구워 만든 ‘훈’

징 10개 나무틀에 매달아 만든 ‘운라’

처음 보는 우리 악기 호기심 자극하고

자연 같은 소리 들으면 마음 푸근해져

천둥·번개 소리, 바람 소리, 한여름 소나기 소리, 구름이 몰려들고 지나가는 그곳에서 새싹이 돋아 신록으로 물들고 녹음으로 우거지는 과정에서 여름이 내는 소리, 곡식 여물어가는 가을 들녘이 내는 소리, 그리고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담은 겨울의 소리까지…. 자연의 소리가 음이 되고 가락이 되어 우리의 악기에 담긴다. 그리고 우리의 악기는 울림을 통해 자연의 소리를 어떻게 변주하는지 보여준다. 그런 소리가 가득한 서초구 서초동 국악박물관에 다녀왔다.


소리, 마음을 울리다

푸른 숲에 울리는 새소리로 시작한 영상이 이내 산과 들로 이어지고 그곳에서도 새소리는 명랑하다. 새 부리를 닮은 새싹이 돋아나고, 연둣빛 여린 잎에서 어린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소리 없이 흐르는 냇물은 그 곁을 작은 들꽃과 나누었다. 순간 영상은 흐르는데 소리는 없다. 그 적막감이 그 어떤 소리보다 깊은 울림이 되어 다가왔다.

기와 돌담에 얹힌 나뭇잎은 제법 진한 초록 물이 들었다. 여름이다. 녹음 짙은 산, 절집 풍경이 지나고, 벌집에 꿀을 모으는 꿀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한여름 땡볕처럼 쨍쨍하다. 먹구름이 몰려드는 영상은 천둥소리를 토해낸다. 굵은 소나기 한줄기 내리며 세찬 바람이 지나가고, 처마 끝 기와에서 떨어진 빗물은 처마의 선을 따라 마당에도 줄줄이 홈을 만들었다.

하늘 넓이만큼 빗방울은 땅도 적시니, 산골짜기 개구쟁이 같은 작은 계곡 쫄쫄쫄 흐르는 물줄기 소리는 연둣빛 신록을 닮았다. 금세 바뀐 영상에는 눈이 쌓이고 얼음 언 계곡,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도 이에 공명한다.

얼음은 녹고, 푸른 물이 웅덩이에 고였다 흐르고, 웅덩이에 고이는 건 또다시 봄의 새소리. 계곡에서 시내로 다시 강으로 이어지는 영상은 바다를 보여준다. 갈매기 소리, 쉼 없이 밀려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 생명의 바다를 보여주던 영상은 고개 숙인 벼, 황금 들녘으로 바뀐다. 바람에 넘실대는 벼 포기들이 서걱대는 소리는 일렁이는 대숲 소리로 절정을 맞이한다. 자연의 소리에 이어지는 다듬이 소리, 맷돌 소리, 아궁이 장작 타는 소리…. 자연이 품은 인간의 소리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의 소리다.


우리 악기 체험공간.

국악박물관 1층 전시실 ‘국악뜰’에 가면 이 모든 소리와 영상을 볼 수 있다. 대형 스크린에 흐르는 영상, 마치 영상 속 그 현장에 있는 것같이 들리는 소리, 국악박물관은 왜 1층 전시실 대부분을 이렇게 할애했을까?

감동·이해보다 느낌이 먼저다. 느껴야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자연의 소리에서 태어난 음악, 음악을 담는 그릇인 우리의 악기, 사람을 통해 우러나는 소리, 우리의 산천에서 우리의 마음이 열려 우리의 악기를 울리는 것이다.


소리에서 음악으로

‘악기는 음악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문구가 ‘악기실’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악기실’은 음악으로 자연의 소리를 표현하는 옛 악기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고대에는 기원의 의식에 노래와 춤이 함께했다. 자연에서 얻은 나무·돌·뼈·뿔 등으로 소리 나는 도구를 만들어 두드리고 불어서 소리를 냈다. 이후 나무를 깎은 몸통에 줄을 매어 퉁기고 뜯으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황(사진 왼쪽), 훈(오른쪽).

대나무관 여러 개로 만든 울림통으로 소리를 내는 생황과 소, 흙을 구워 만든 관악기 훈, 나뭇잎 피리(풀피리)도 전시했다. 태평소, 쌍피리, 향피리, 당피리, 세피리, 단소, 퉁소, 소금, 지, 정악대금, 산조대금, 적, 약, 고동, 나발, 나각(소라로 만든 관악기) 등 평소에 알지 못했던 다양한 관악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슬(아래)과 금(위).

가야금과 거문고, 아쟁, 비파를 비롯해서 소공후, 와공후, 수공후, 양금 등 다양한 현악기도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현악기 중 가장 큰 ‘슬’과 검은 칠을 한 울림통의 ‘금’이 눈에 띈다. 슬은 오동나무와 엄나무로 앞판과 뒤판을 만든다. 앞판에는 구름과 학을 그렸다. 25줄로 구성됐다.

잘 알려진 북, 장구, 꽹과리, 징을 비롯한 다양한 타악기도 볼 수 있다. 입구가 넓은 화로 모양의 타악기인 부, 서양 악기 심벌즈를 닮은 금속 타악기 자바라, 물그릇에 물을 절반쯤 채우고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는 물장구, 접시 모양의 작은 징 10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만든 악기 운라는 여기서 처음 봤다. 그 소리가 궁금했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악기실’ 한쪽 벽에 터치스크린을 설치해 현악기·관악기·타악기 독주와 합주를 화면과 함께 보고 들을 수 있게 했다.

터치스크린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 해본다. 두 줄로 된 현악기인 아쟁의 연주 장면과 소리를 보고 듣는다. 궁중음악·풍류음악·민간음악 등에 두루 쓰이던 악기다. 매력적인 그 소리에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인다. 천둥·번개·비·바람·구름을 상징하는 꽹과리·장구·징·북이 어우러진 사물놀이의 소리를 듣는다. 인공의 악기 소리에서 자연의 소리가 느껴진다. 그 어울림이 마음을 울린다. 소리가 음악이 되고 음악에서 자연의 소리가 이는 순간이다.


보고 듣고 울리며 느껴보는 우리의 악기 소리

‘문헌실’ 앞 벽에 ‘한눈에 보는 국악사’라는 제목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국악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서양 예술 음악사와 아시아 음악사를 곁들여 이해의 폭을 넓혔다.

음악사를 훑어보고 ‘문헌실’로 들어선다. ‘악보는 음악의 창작·보존·재생의 도구이다’라는 문구가 ‘문헌실’이 어떤 공간인지 알려준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관찬악보>(조선시대에 국가기관에서 편찬한 악보집), <세종실록악보>(복제)를 비롯해서 <시용향악보>(복제), 조선 말기 이규경이 현악기 중 하나인 양금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구라철사금자보>(복제), 조선 영조 임금 때 유진한이 쓴 문집 <만화집>에 실린 ‘만화본 춘향가’ 등을 전시했다.

‘아카이브실’은 전통음악·춤·연희를 기록한 음향·동영상 자료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터치스크린을 통해 1950~60년대 남도 굿 피리 가락 연주 ‘김귀봉 컬렉션’, 1960년대 전국의 굿 현장을 담은 ‘최길성 컬렉션’, 1916~17년 독일군 포로가 된 러시아 이주 한인 5인의 노래 ‘베를린 컬렉션’ 등 다양한 희귀 자료를 보고 들을 수 있다.

아카이브실 슬라이드 필름 자료.

전통의 예술을 지키고 그 맥을 이어온 예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명인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들의 후손이나 제자들이 기증·기탁한 악기·음반·악보·사진 등을 볼 수 있다.

명인실을 나서면 전시실에서 보았던 악기 중 일부를 직접 쳐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 펼쳐진다. 장구 앞에선 어른들이 더 신났다. 장구를 쳐본 어른들이 치는 휘모리장단·자진모리장단 가락 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크기가 다른 북 다섯 개를 이어서 치는 소리가 듣기 좋은 음으로 조화를 이룬다. 편경과 편종을 닮은 악기 소리도 울림이 좋다. ‘만지는 소리’는 벽에 설치한 악기를 만지면 그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공간이다.

주사위 산조합주. 주사위를 던져 세 가지 악기를 선택하면 그 악기의 합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주사위 산조합주’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주사위 놀이를 해 악기 세 개를 직접 골라, 그 세 악기의 합주를 들을 수 있는 시설이다. 엄마 아빠와 아이들이 다 같이 활짝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 웃음이 1층 ‘국악뜰’에서 보고 들었던 푸르른 새싹과 어린 새소리를 닮았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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