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성곽 40리 한바퀴 돈 듯…한양도성 역사 한눈에

서울의 작은 박물관 ⑬ 종로구 종로6가 한양도성박물관

등록 : 2019-09-05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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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 연결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수도 성곽

양인 20만이 외침 막으려 쌓은 그곳엔

온종일 경치 즐기던 풍류도 존재

한양도성박물관. 박물관 옆에 낙산으로 올라가는 한양도성 성곽이 보인다.

18.627㎞. 조선의 수도 한양의 경계를 따라 이어진 성곽길 길이이다. 조선 시대 한양 사람들은 성곽을 따라 걸으며 온종일 경치를 즐기고 풍류를 나누며 놀았다. 그것을 ‘순성’이라고 했다. 외세의 침략과 도시의 팽창으로 훼손됐던 한양도성 복원 노력과 함께 옛 순성의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본 만큼 깊어진다는 말처럼, 한양도성 순성에 나서기 전에 ‘한양도성박물관’에 들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양도성의 역사를 알아볼 일이다.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수도 성곽이다.

한양도성 한 바퀴


백악산(북악산)에 오르면 경복궁에서 곧게 뻗은 세종대로와 주변 건물이 한눈에 보인다. 길가 빌딩들이 세종대로를 호위하는 것 같다. 길과 풍경에서 위용이 보인다. 한양도성의 한 지점인 백악 곡성에서 본 북한산에서 한 나라의 수도를 호위하는 늠름한 장군의 기상을 읽는다.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백악산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긴 인왕산의 수려한 풍경 속을 걸으며 조선의 도읍 한양을 그려본다. 한강 건너편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경계까지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성곽이 사라진 도심의 길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길은 다시 남산으로 이어진다. 숲과 어우러진 조선 태조 임금 때 쌓은 성곽에서 고풍을 느끼고 흥인지문에 다다른다.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서 혜화문으로 내려오는 길은 한양도성 성곽길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의 경계에 지은 성곽을 따라 걸었던 10여 번의 길,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그 길에서 옛사람들의 풍류를 느꼈다.

조선 시대 수도 한양을 품은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두고 내사산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내사산을 잇는 성곽을 쌓게 한다. 그것이 1396년 완공된 한양도성이다. 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자 도성민의 삶을 지키던 울타리였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에 도성을 한 바퀴 돌며 놀던 순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40리 도성 둘레를 하루에 걸으며 성 안팎의 경치를 즐기고 풍류를 나누었던 것이다. 새벽에 시작해서 해 질 때 끝났는데, 산길이 험해 포기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양도성 순성길을 걸으며 궁금한 것이 많았다. 종로구 종로6가 동대문성곽공원 안에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에서 그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렸다.

숭례문 모형.

한양도성을 쌓은 사람들

과연 누가 한양도성을 쌓았을까?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된 안내글에 따르면 한양도성을 쌓은 사람들은 조선 시대 양인이었다.

양인은 사대부와 천민을 제외한 자유인이었다. 나라에 세금을 내야 했고, 공물(지역 특산품)을 바쳐야 했으며, 요역(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에 동원됐다.

1396(태조5)년에는 경상, 전라, 강원과 국경 인근 지역을 제외한 서북면과 동북면 양인이 동원됐는데, 그 수가 20만 명에 조금 못 미쳤다고 한다. 경기, 충청, 황해도 양인들은 궁궐을 짓는 데 동원됐다. 1422년(세종4)에는 전국에서 32만2460명의 양인이 동원됐다고 한다.

성곽 쌓기는 땅을 다지는 것부터 시작됐다. 안내글에 따르면 바닥이 흙이면 땅을 깊이 파서 나무 말뚝을 박거나 잔돌을 넣어 다지고 암반이면 미끄러지지 않도록 돌을 평평하게 다듬었다.

한양도성 성곽 보수 공사하는 모습을 작은 모형으로 만들었다.

성곽을 쌓은 역사는 성곽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양도성을 따라 걷다보면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때 쌓은 돌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을 쌓은 돌에 새겨진 글자(각자성석)도 있다. 태조 때는 구간을 표시하는 숫자, 세종 때는 군·현의 이름, 조선 후기에는 공사 시기, 담당 군영 이름, 공사 책임자, 공사 감독자 등의 이름을 새겼다. 그때부터 공사 실명제를 시행한 것이다. 한양도성의 전 구간에서 297개가 넘는 각자성석이 발견됐다. 전시관에 전시된 각자성석 탁본 14개에 눈길이 머문다.

한양도성박물관은 성에 남아 있는 이런 흔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군영등록> 등 당시 국가 기록에 남아 있는 문헌의 내용과 일치하므로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가 그만큼 높은 것으로 평가한다.

한양도성 성돌에 새겨진 글자의 탁본.

성 안팎 사람들

한양도성박물관에 가면 조선의 수도 한양이 계획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관 안내글에 따르면 1392년 7월 조선의 문을 연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지만 궁궐과 성벽이 없는 한양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곧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 2년 동안 도읍지를 물색했다. 도라산, 개경, 적성 광실원, 계룡산, 무악 등이 도성 후보로 올랐지만 한양만 한 곳이 없었다. 새 나라의 새 수도는 한양으로 결정됐고, 1394년(태조3) 10월 조선왕조는 한양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도성 건설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북한산과 한강 사이의 한양은 고려 시대부터 삼한 제일의 명당으로 꼽혔다.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하천(지금의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남산 남쪽에 있는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형국이다.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 백악산 앞에 궁궐을 지었고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을 배치했다. 궁궐 앞 대로에 주요 관청을 두었고, 도성 내부를 관통하는 ‘丁’자형 큰길 좌우에는 시전(상설시장)을 마련했다.

자료에 따르면 도성 안에 사는 사람은 조세와 공물, 요역을 면제받았다. 그 대신 도성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해결할 의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도성 안에 불이 나면 모두 불을 끄러 나와야 했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때나 성안으로 드나들 수 없었다. 과거 시험 때, 군대나 공장으로 불려가는 사람들, 성안에서 소비되는 물자를 공급하는 사람들이 때에 맞춰 드나들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새벽마다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 밖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생필품 실은 우마차 행렬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한양도성박물관에서 나오는 길, 파란 가을 하늘 뭉게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려온다. 햇빛이 닿는 곳에 남산 회현 자락에서 출토된 한양도성 성돌 다섯 개가 놓여 있다. 발길이 저절로 낙산으로 올라가는 성곽길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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