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틈틈이 꺼내보는 나의 생존지도

또 다른 나를 알린 비밀 수첩에 대해

등록 : 2019-06-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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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의 완벽한 부활에는

‘상대 타자 공략법 수첩’ 큰역할

나는 무엇을 담았는지 묻는다

당신의 생존지도는 무엇인가요?

마음의 무좀이라도 걸린 것일까?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 단 한 줄의 문장도 써지지 않는다. 영어권에서 ‘작가의 장벽’이라 표현하는 끔찍한 시간이다. 특효약은 단 하나, 일상에서 벗어나 장소와 분위기를 바꿔주는 것뿐이다. 마침 사무실을 이전한 지인이 있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커피 한잔 줄 수 있어요? 근처를 지나는 길인데, 사무실 구경 좀 시켜줘요.”

마음이 있는 자는 금방 눈치챈다. 여기서 말하는 커피란 단순한 음료가 아니고 사무실 구경을 핑계로 잠시 얼굴을 보고 싶다는 뜻일 테니까. 서울 외곽에 있던 곳을 나와서 지인이 새로 입주한 곳은 시내 중심에 있는 공유사무실 건물이었다. 스타트업이나 자기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로 붐볐고, 특유의 젊고 역동적이며 생산적인 에너지 파동으로 가득했다. 적지 않은 단점에도 정치나 사업에서만 읽을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다. 실패와 부정을 사랑하는 대신 긍정과 성장을 가까이하고 사랑하려는 자세다.


저명한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어록을 패러디하자면, ‘장소가 곧 메시지’이다. 사무실 이전은 사업가로서 그의 의지와 방향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공유 라운지에서 커피를 매개로 몇 사람이 탁자에 앉았는데, 저마다 업무 수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덧 2019년도 절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군요. 이 수첩에 적어놓은 것 중 남다른 내용이 있다면 얘기해줄 수 있어요?”

수첩을 보면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내가 질문했다. 직장 생활의 미로에서 탈출구 찾기를 시도하는 이들에게 업무수첩에는 저마다 생존지도가 그려져 있을 것이라 믿는 오랜 버릇이기도 하다.

어깨 부상에서 돌아온 류현진이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부활한 성공 요인으로 상대 타자 공략법을 적어둔 작은 수첩을 꼽는다. 전력분석팀의 자료에 투수코치의 데이터를 보태 만든 것으로, 공수 교대 때마다 그는 수첩을 꺼내 들고 타자들의 특징을 살핀다고 한다. 류현진에게 그 수첩은 최고의 부활 지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사례와 함께 돌아가며 수첩에 얽힌 이야기를 하다가 30대 후반 여성 차례가 되었다.

“올해 초 제가 업무 다이어리 첫 장에 쓴 글은 ‘나의 정체성 찾기'입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사는 ‘나'입니다. 대학교 졸업하고 직장 생활 하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물 흐르듯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제 주장이 강한 편이었는데 요즘은 모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주장이 강한 사람이 있으면 양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워졌어요. 지혜롭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답니다.”

늘 주변을 배려하고 업무 처리도 똑 부러질 정도로 잘 마무리 짓는 사람이었기에 뜻밖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직장에서나 집안에서나 완벽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스트레스가 더 많은 법이다. 여기에 어느 날 의식되기 시작한 마흔이란 거대한 봉우리는 마음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하다. ‘마흔 증후군’이다.

유아기를 지나 청소년기라는 혹독한 시간을 거쳐 한 사람의 성인으로 우뚝 서듯이,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다 어느 날 갑자기 ‘나’란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아이도 학교에 가고 직장에서도 내 앞가림을 하게 될 무렵 문득 찾아오는 버거운 질문이다.

‘훌륭한 엄마? 멋진 딸? 매력적인 아내? 일 잘하는 직장인? 급한 업무 처리와 진짜로 중요한 것 사이에 나는 제대로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통과의례 시간이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잘 살아온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쩌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생각돼 혼란스럽다. 남들과 잘 지내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만의 색깔도 확실히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도 꿈틀거린다. 그만큼 ‘나답다’란 개념은 어렵고 또 절실하다.

마흔은 사회생활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이고 긴 터널이다. 사람마다 다르고 일의 성격도 달라 일반화하기는 힘들지만, 피해야 할 두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의존’과 ‘간섭’이다. 누군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 그리고 지나친 간섭을 말한다. 자명해 보이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직장 생활이건 가정에서건 그렇다. 직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간절한 것은 자유다. 일상에서 탈출을 꿈꾼다. 그런 사람들에게 피카소가 한 명언이 있다.

“가장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바로 가장 자유로운 순간인 경우가 있다.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외 없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 날개는 걷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날개가 걷는 데 방해만 된다니, 자유의 이중적 속성이다. 지금의 혼돈과 고통은 곧 ‘나’의 탄생을 알리는 시간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업무수첩은 곧 나를 찾는 비밀 수첩이기도 하다. 멋진 자아가 시작되는, 출산의 고통이 담긴 비밀 병기다.

또 다른 업무수첩을 소개하고 싶다. 창업했다가 실패한 뒤 관리자로 다시 취업해 업무일기를 쓴 50대 중반 남자 얘기다. 영업을 위해 다른 업소를 방문해 발표하게 될 때마다 한 이야기를 모았더니 9년 동안 865회나 된다고 한다. 수첩이 곧 그의 인생이었고 부활의 기록이었다.

어느 날 그는 수첩을 보다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교회에서 십일조 하듯, 열 마디 가운데 한 마디는 자신을 칭찬하자는 것이다. 그의 행복 비밀이었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지만 그 불행으로 이끄는 지름길은 ‘조급함’이다. 나에게 관대해지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l저서『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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