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분노 뒤 화해 대상은 상대가 아니라 나였다

같은 사람에게 수모를 두 번씩이나 당한 뒤

등록 : 2019-05-16 15:16 수정 : 2019-05-1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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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상처 준 사람의 밥 먹자는 연락

식사 약속 뒤 당일 감감무소식

연락하자 “사정 설명한 줄 알았는데…”

나의 분노에 대해 글로 적어봤다

살다보면 가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다. 얼마 전 강연을 끝내고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카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 아니 내 연락처 명단에서 지워버린 이름이었다.

퇴직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무렵 회사와 조직 밖의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지 처절히 겪게 해준 사람이었다. 프로젝트 함께하자고 제안해놓고 내가 퇴직하니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그것도 직접 만나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야밤에 전자편지 한 통으로 말이다. 잃어버린 기회비용도 적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깊게 파고 들어간 상처가 더 아팠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그가 다시 만나자는 것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신문에 쓰시는 칼럼 읽으며 또 주변 분들 통해 근황 종종 듣고 있습니다. 언젠가 쓰신 글처럼 밥 한번 하셔야죠?”


그렇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밥’이 갖는 복합적인 함의를 담아 언젠가 이 지면에 쓴 적이 있다. ‘밥 한번 하자'는 말은 단순히 위의 시장기를 덜기 위한 행위가 아니고, 친구가 되고 싶다거나 마음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뜻이다. 반대로 ‘그 친구와 다시는 밥 먹나봐라!'는 말은 절교를 의미한다. 한국어에서 ‘밥’이란 단어는 이토록 인간관계의 복잡한 심리를 담은 중층적인 은유다.

그러하였기에 식품이 발효하듯 며칠 동안 마음은 부글부글 부대꼈다. 그러한데도 한 번뿐인 인생, 모질게 살지 말고 앙금을 풀자고 애써 나 자신을 타이른 뒤 회신했다. 그쪽의 일정에 맞춰 약속을 잡고 막걸리를 마시자고 했다. 그런데 약속 날짜가 다 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약속 당일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아무런 해명도 없었다. 며칠 동안 참다가 도대체 무슨 곡절인지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더욱 기가 찼다.

“갑자기 피치 못할 약속이 생겼습니다. 사정 설명했다고 기억하지만 아마 제가 놓친 모양입니다.”

남자가 연락하지 않는 이유는 “옥중, 상중, 병중, 안중” 가운데 하나라고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경우는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평소에 그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말과 약속의 무게와 신뢰가 어떤지 알면서도 같은 돌부리에 다시 걸려 넘어진다 생각하니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화산의 마그마처럼 일시에 분노가 터져나왔다. 용암과 화산재가 여기저기 튀듯 자칫 감정의 파편이 튀어 사고 칠 우려가 있었다.

잭 니컬슨과 아담 샌들러가 주연으로 나왔던 <성질 죽이기>(Anger Management)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한국에서 개봉될 때는 ‘성질 죽이기’로 번역되었지만, 원뜻은 ‘분노 조절’이다. 본래 성격 착한 주인공이 출장 가는 길에 우연한 일에 휘말리면서 법원으로부터 분노 조절 심리 프로그램을 이수하라는 명령을 받으며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분노가 일어날 때 어떻게 푸는 게 좋을까요?”

페이스북 친구들의 집단지성에 의지해보기로 했다. 술 마시기, 잠자기, 묵상, 기도, 수다 떨기 같은 전통적 방법 이외에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속출했다.

“저는 제일 화사한 색깔의 운동화를 신고 10분 정도 뜁니다.”

“무작정 걷습니다. 초록이 주는 위안 속으로 걸어들어가죠.”

“지천에 있는 산에 살방살방 다닙니다. 산이 훼손되지 않게, 내 맘 다치지 않게 가볍게 가볍게요.”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뜁니다. 제 호흡에 집중하며 뛰다보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조차 잊게 됩니다.”

“소리 지르기. 도심에서는 코인노래방이 있어서 실컷 노래를 부르거나 자동차 운전을 할 때는 차 안에서 마음껏 감정을 표출해보는 겁니다. 혹은 공사장 같은 곳도 좋구요.”

답변과 해법을 듣다보니 참으로 많은 사람이 분노와 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소 방법이 다른 것처럼 분노의 종류도 다양하였다. 마치 격발장치를 건들면 곧바로 총알이 튀어나가듯 분노의 에너지로 가득하였고 잔뜩 화가 나 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세대 간에, 남녀 간에 긴장이 가득했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예민한 주제를 올리면 평소 말 한번 섞어본 적 없는 이들이 벌 떼처럼 몰려와 무례한 언사로 공격해온다. 나이를 먹으면서 공연히 화가 나기도 한다. 색다른 해법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분노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에 대해 풀릴 때까지 쓰세요!”

다락방에 숨어 긴 시간 지내야 했던 네덜란드의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가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유대인의 경구가 떠올랐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어린 소녀가 나보다 훨씬 더 현명하였다. 분노를 글로 푸는 것이다. 마음 한쪽에 어떤 결핍이 무겁게 자리잡은 상태에서 누군가 그것을 건드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스스로의 어리석음도 가세한다. 상처는 누가 준 게 아니라 계기였을 뿐 스스로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열등감이나 수치심, 버림받았다는 심리, 불안감이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일시에 맨홀 뚜껑이 열리듯 폭발되어 나온 것이다.

서양 최고의 고전이라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주제 역시 분노다. 아끼는 사람을 빼앗긴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작품의 중심축이다. 이처럼 분노는 인간 역사의 오랜 뿌리다.

결국은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열등감이건 수치심이건 불안감이건 떨쳐내야 한다. 분노는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칼날이기 때문이다. 화해해야 할 대상은 분노를 일으킨 상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단련해야 할 것은 육체의 근육만이 아니다. 어리석은 마음의 근육도 함께 단련해야 한다. 독이 약이 되기도 하듯, 분노 역시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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