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조선 중기 주택난 한양, 재력가 퇴계도 월세살이

중구 서소문동 이황 선생 집터 上

등록 : 2019-05-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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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서울시립미술관 화단에 있던 푯돌

2016년 현재 위치로 이동

중구청 문화 웹사이트 선생 한자 이름

‘李滉’을 ‘二黃’으로 적는

어처구니없는 실수 저질러

“하인도 없고 땔나무도 없이…”

<명종실록>에 청빈한 한양살이 기록

재력가이면서 요직 중 요직 지냈으나


“영화를 뜬구름 보듯 한” 검약한 생활

서소문로 앞에서 퇴계 이황 선생 집터의 푯돌이 있는 한산빌딩 방향으로 찍은 사진. 퇴계 이황의 서울 셋방이 있던 서소문은 기와집이 즐비한 반촌이었다. 학다리가 있다고 하여 학교동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중구 서소문동 47의 2 퇴계 이황 선생 집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로 나오면 만나는 옛 대한항공 본사 바로 다음 건물인 한산빌딩 앞에 있다.

번잡한 서소문 거리를 바삐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전봇대와 선간판 사이에 꼭꼭 숨겨놓은 듯하다. 눈을 부라려야 겨우 찾을 수 있다. 게다가 푯돌 앞은 주위 사무실을 드나드는 배달 오토바이들의 전용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오토바이들이 푯돌 앞을 가로막는 통에 온전한 사진 한 장 찍기 어렵다.

푯돌은 중구 서소문동 37 서울시립미술관(옛 대법원) 올라가는 호젓한 화단에 1988년부터 놓여 있었다. 위치가 잘못됐다고 하여 2016년 현재의 자리에 옮겼다. 푯돌에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1501~1570)이 젊은 시절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살던 집터’라고 새겨져 있다.

1988년에 제작한 첫 푯돌에는 ‘뛰어난 성리학자 퇴계 이황(1501~1570) 선생 집터’라고 무미건조하게 적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뛰어난 성리학자’를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고치고, ‘집터’를 ‘젊은 시절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살던 집터’라고 조금 살을 붙여 보완했다.

제자리 찾기도 좋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푯돌 이전 사실을 모른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정보는 중구난방이다. 푯돌을 관리하는 서울 중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관광 웹사이트(www.junggu.seoul.kr)에는 푯돌이 아직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있는 것으로 돼 있고, 사진도 이전 위치의 푯돌 사진이 올라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황 선생 집터’를 한자로 ‘二黃先生家址’라고 써놓았다. 선생의 한자 이름 ‘李滉’을 ‘二黃’이라고 적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관할 구청 웹사이트에서 푯돌 이전 사실을 수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엉터리 한자 이름까지 적어놓다니…. 그 많은 조선 선비 중 ‘공맹정주’(공자·맹자·정자·주자)의 아류가 아니라 ‘퇴계학’이라는 독창적 유학의 시조로 남은 이자(李子) 반열의 대학자요, 천원짜리 지폐 속 인물이기도 한 퇴계의 유일한 서울 흔적은 이렇게 참담한 대접을 받고 있다.

선생이 살던 시절 한양 서소문에는 학다리라는 제법 긴 다리가 있어서 ‘학교동’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됐다. 또 서울의 5개 학당 중 서부학당 근처여서 학동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현재의 서소문 큰 거리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시립미술관 화단 위쪽에는 퇴계 선생 집터 푯돌이, 아래쪽에는 사계 김장생과 아들 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집터 푯돌이 있었다. 해동 18현 중 3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도산서원.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은 신라의 설총·최치원, 고려의 안향·정몽주, 조선의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 등 모두 18명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선비 가문에서 정승과 판서 벼슬은 잠깐이지만 문묘 배향은 대대손손 자랑거리였다.

사실 퇴계가 살던 집이 정확하게 어딘지 고증하기 어렵다. 역사가 중첩된 서울 도심이어서 이미 도로나 건물이 들어섰다면 옛 집터에 푯돌을 세우기란 가능하지 않다. 다만 사대문 안 서소문에서 살았으니 서촌에 거주한 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색당파가 생기기 전 동인의 거두인 김효원, 남인 류성룡이 선생의 문하생이니 당파나 지역색과는 무관하다. 학문으로도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동인과 남인을 아우른 종사(宗師·모든 사람이 높이 우러러 존경하는 사람)라고 할 만하다.

단지 서울 집터를 통해 퇴계가 중앙 관료 생활을 한 10년 가까운 서울 생활을 추측해볼 뿐이다. 경상도 안동 출신인 선생은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외교 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에 배치됐다. <퇴계선생문집> 권2에 실린 ‘살구꽃’의 “한양 셋집 뜰이 비었더니(漢陽賃屋園院空)/ 해마다 울긋불긋 갖가지 꽃이 무성히 피어나네(年年雜樹開繁紅)”란 시구에서 선생의 ‘남의집살이’를 짐작할 수 있다.

<퇴계선생문집>

집으로 따져본 조선 중기의 서울살이는 어땠을까. 서울은 왕족과 관료 그리고 상인과 군인을 위한 도시였다. 이들을 제외한 서울 인구의 대부분은 왕족과 관료를 모시는 아전과 노비가 차지했다. 서울은 들고나는 사람이 넘쳐 늘 주택난을 겪었다. 조선 시대 서울에는 남의 집에 세 들어 살거나, 얹혀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과거 공부를 하러 시골에서 온 사람, 과거에 합격해서 관리가 된 사람, 세도가와 연줄을 맺기 위해 상경한 사람, 결혼 후 분가한 사람, 장사하러 온 사람 등 호구조사에 잡히지 않는 구성원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3년에 한 번 과거가 치러지는 식년시의 해이거나 각종 명목의 과거가 예정되면 ‘과거 낭인’ 10만 명이 거리를 떠돌았다. 서울 인구 20만 명일 때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폭증하니 심각한 주택난이 일어났다. 인구 증가율이 주택 증가율을 웃돌았기 때문에 갈 곳 없는 상경민은 청계천 변에 움막을 짓거나, 한강 변에 토막을 파서 살았다. 세도가에서 권력을 무기로 평민의 집을 빼앗는 ‘여가탈입’(閭家奪入)이라는 범죄가 벌어져, 17세기 후반 숙종 때 이를 금지하는 조처를 내리기도 했다.

전세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주택 임대 방식이어서 정확한 기원은 알기 어렵지만, 조선 시대 논밭을 담보로 돈을 융통하던 전당 제도가 조선 후기 들어 가옥에도 적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선생의 시대에는 전세가 아니라 월세를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벼슬이나 문벌을 떠나 조선 시대 시골 출신 관리의 서울살이는 대개 월세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연구에 따르면 집세는 주로 쌀과 부식으로 치렀고, 때로 포육과 반찬거리를 달마다 몇 번씩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퇴계뿐 아니라 조선 전기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로 도승지와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1431~1492) 같은 인물도 셋방살이의 설움을 <점필재집> 제16권에 상세하게 남겼다. “성중에 있는 몇몇 집들은/ 다 내가 머물러 살았던 집인데/ 때로는 내쫓음을 당하여/ 동서로 자주 떠돌아다녔네”라고 묘사했다. 또 “남산 아래에 셋집 얻어 사노니/ 나귀 타고 출퇴근을 할 만하다”라면서 명례방(명동)에 세 들고 난 뒤의 편안한 심정도 시로 남겼다. 오늘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을 지낸 그도 경상도 밀양에서 상경했기에 셋방살이 신세였다. 당시는 벼슬이 끊어지면 낙향하는 게 기본이었고, 서울 집값이 비싸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고위 관리도 내쫓은 서울 집주인들의 ‘갑질’도 엿볼 수 있다.

천원짜리 지폐 속 퇴계 영정.

퇴계의 인품과 서울 생활이 기록된 <명종실록> 권24 1558년 6월9일자에 “이황은 재주와 행실을 함께 갖추어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황은 청빈으로 자신을 지키므로, 서울에 있을 적에도 본디 집에 부리는 하인이 없어서 땔나무도 대기가 어려웠습니다”라고 영의정 심연원과 대제학 정사룡이 임금에게 아뢴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 퇴계 사후 사관이 남긴 인물평인 졸기가 실린 <선조수정실록> 선조 3년 12월1일자에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력으로 학문을 하였는데, 문장이 일찍 성취되었고… 오로지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는 그것을 좋아하여 그 교훈대로 따랐다… 빈약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을 좋아했으며, 이끗(재물의 이익이 되는 실마리)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퇴계는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언론 삼사’라 한 홍문관에서 정6품 수찬, 정5품 교리, 정4품 응교를 각각 지냈다. 왕이 내리는 교서를 작성하고,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출세를 보장받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이미 성리학에 통달해, ‘동방의 주자’라는 이름을 얻어, 사방에서 학자들이 몰려들어 배움을 청했다. 50세 이후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 등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거듭했다. 그는 비록 서울에서 청렴하게 월세를 살았지만, 지역에서는 유지이자 재력가였다. 선생의 아들 이준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기록인 1586년도 ‘분재기’(分財記)에 따르면 영천, 의령에 36만여 평의 땅과 367명에 이르는 적지 않은 노비를 보유했다. 하편으로 이어짐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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