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신중현의 3대 명반 꼽히는 ‘김정미 NOW’

김추자·김정미 (하)

등록 : 2018-08-1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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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

김추자보다 음폭이 좁았지만

신중현 사이키델릭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하고 소화한 가수

박정권 탄압 음반 폐기돼 희귀 음반

1978년 사라진 이후 신비한 존재로

김추자

다이나믹하고 화려한 춤사위


숱한 스캔들로 대중에 확실한 인상

국악, 록, 솔, 트로트 등 폭넓은 가창력

김추자(사진 왼쪽) 김정미 70년대 전성기 사진

1975년 가수들의 대규모 활동 금지를 몰고 왔던 대마초 사건 이전에 발매된 김추자와 김정미의 엘피(LP)들은 대부분 희귀 앨범으로 분류된다. 두 가수의 음반들은 신중현 음악의 브랜드 파워와 대중가요 LP의 가격 폭등을 주도하는 핫 이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인지도와 활동 기간이 차이가 나듯이 김추자와 김정미가 발매한 앨범 수는 큰 간격이 있다. 일반 대중이 아닌 대중가요 LP수집가들로만 국한해 본다면, 두 가수의 음반들에 대한 선호도는 역전되거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한 세기가 저물어가던 1990년대 말, 중고 LP가게가 몰려 있는 서울 청계천과 회현동 지하상가에는 일본 사람들이 신중현 음반을 위시하여 한국의 60~70년대 록, 포크 음반을 가격 불문하며 싹쓸이했던 적이 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음반은 섹시하게 노래하는 신중현 사단의 대표 여가수 김추자와 김정미 음반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김추자를 모르는 국내 음반 수집가는 없었지만 낯선 이름의 김정미는 ‘섹시한 비음을 구사한다’는 입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자극하며 가격이 엄청나게 폭등했다.

두 가수의 빛과 그림자

김추자는 터질 것 같은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낸 꽉 조이는 의상과 엉덩이를 현란하게 돌려대는 다이내믹한 춤으로 대중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섹시한 외모에 폭발적인 가창력까지 겸비한 그의 등장에 정적이 흐르던 당대 사회는 후끈 달아올랐다. 70년대의 패션 리더로 젊은 층에 어필했던 김추자는 수많은 스캔들과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로 떠오르는 뉴스메이커였다. 7080세대들에게 김추자는 ‘잠자던 돌부처도 돌려세웠다’는 말까지 나돌았던 섹시 가수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이면에는 숱한 스캔들과 활동 중단과 컴백을 반복하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김정미 70년대 희귀 앨범들

반면 김정미의 활동 반경은 판이했다. 김추자의 대타로 등장했던 그는 섹시한 미모와 열정적인 춤과 가창력으로 각종 언론에 의해 기대주로 평가받았지만, ‘제2의 김추자’란 꼬리표를 활동 기간 내내 달아야 했다. 신중현은 원래 여러 가수에게 같은 곡을 녹음시키는 방식을 유지했다. 김추자, 김정미도 ‘잊어야 한다면’ ‘고독한 마음’ ‘아니야’ ‘추억’ 등 같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중 드라마 주제가 ‘셋방살이’는 원래 김추자가 먼저 방송에서 불렀지만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 금지를 당하면서 김정미가 대신 불러 히트한 노래다. 김정미는 대중이 기억할 스캔들 하나 없었던 착한(?) 이미지였기에 온갖 소문과 사연을 만발시켰던 김추자의 화려했던 대중적 인기와는 거리가 있었다.

외모와 음폭과 음악 장르

두 가수는 외모도 판이했다. 김추자는 복스럽고 통통한 고전적 이미지가 강했다면, 김정미는 시원한 이목구비와 당시로서는 훤칠했던 164㎝의 키에 볼륨감 넘치는 몸매로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선탠한 것 같은 야성적인 피부색으로 ‘인디언 추장의 딸’이란 별명을 얻었던 이국적 외모의 소유자였다.

김추자의 70년대 희귀 앨범들

국악에 음악의 뿌리를 둔 김추자는 음폭이 넓은 가창력으로 비트 강한 록과 솔, 팝은 물론이고 민요, 트로트까지 그 모든 장르를 깊은 감성으로 소화해냈다. 김추자가 타고난 천부적 재질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맛깔나게 소화해낸 만능 가수였다면, 김정미는 피나는 노력으로 사이키델릭에 특화된 보컬을 선보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신중현이 아닌 다른 작곡가들의 트로트 곡을 노래한 김정미의 음반은 사이키델릭에서 안겨준 감동이 깔끔하게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김정미의 존재가치는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을 가장 잘 표현하고 소화해낸 가수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신중현 사이키델릭의 대표 주자 김정미

김정미 4집의 ‘바람’과 5집에 수록된 ‘봄’은 국내 사이키델릭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외국에서도 명성이 높은 <김정미 NOW> 음반은 신중현의 디스코그래피에서도 ‘에드훠’(Add4) 첫 앨범과 ‘신중현과 엽전들’ 1집과 더불어 3대 명반으로 손꼽힌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간 코스모스와 김정미가 함께 어우러진 재킷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신중현이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진 이 사진 속 코스모스는 ‘사이키델릭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김정미는 김추자보다 음폭이나 가창력은 다소 부족했지만,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표현해낸 가수로 평가받는다. 그의 전위적인 춤사위와 비음이 섞인 섹시한 보컬은 명불허전이다. 김정미는 사이키델릭에서만은 김추자를 능가했다. 콧소리가 배인 그의 음색은 에로틱한 느낌까지 안겨준다. 정돈되지 않은 듯 보였던 현란한 춤은 행위예술가의 그것처럼 진지했다.

불운과 전설의 시작인 대마초 사건

‘가요정화 운동’이라 했던 1975년의 대마초 사건은 김정미, 김추자에게 불운의 시작인 동시에 새로운 전설의 서막이었다. 사건에 연루된 김추자는 활동 금지되었고 그때까지 신중현의 곡만 불렀던 김정미도 모든 노래에 금지 족쇄가 채워졌다. 또한 신중현 사단의 가수라는 이유로 대마초 가수로 오인당했던 김정미는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당시 언론에서 김정미는 “하루아침에 오리지널 노래가 없는 가수로 전락해버렸다”고 한탄했다. 신중현의 운명처럼 그의 모든 음반도 폐기되어 희귀 음반이 되었다.

막 꽃봉오리를 터뜨린 순간에 찾아든 음악적 좌절은 김정미의 이름을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2000년대 들어 불기 시작한 복고 문화의 영향으로 김정미는 젊은 록 애호층에 ‘사이키델릭의 여왕’이란 재평가를 받아냈다. 김추자의 귀한 음반들조차 김정미의 음반들에 비해 왜소해 보이는 것은 오리지널 음반을 실물로 보기가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김추자가 철모를 쓰고 총을 들고 있다는 음반은 필자도 귀동냥만 했을 뿐, 실물은 못 보았다. 단 한 번의 컴백으로 온갖 화제와 소문을 만발시키고 한순간에 사라진 김추자와 더불어 1978년 가요계를 떠난 김정미는 7080 음악 부활 이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여전히 신비로운 가수로 남아 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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