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차 기관사는 17살 여고생의 사랑을 싣고 달렸다

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 뚝섬 골목길 (하)

등록 : 2016-04-07 09:58 수정 : 2016-04-2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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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뚝섬 옛 기동차길이었던 성동교 위로 지금은 기동차 대신 전동차가 달리고 있다. 사진 김란기 제공

열일곱 소녀가 기관사에게 한눈에 반했을까, 아니면 기관사가 소녀를 ‘꼬신’ 것일까? 옛 기동차 기관사 이현근(1933년생)씨가 운전했던 옛 기동차 길이 이제는 도시의 골목이 된 이야기로 이어진다.  

소녀는 기관사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다. 소녀 나이 열일곱이면 총각 나이는 스물다섯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늦총각이 소녀를 꼬셨다고 해야겠지만 만만찮은 발랄소녀의 말을 들으니 총각이 잡힐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열일곱 소녀이면 겁없기는 뿔난 송아지이고, 스물다섯 총각은 구렁이쯤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러니 여고 2년생 소녀는 제복 기관사의 멋있는 모습에 반해, 책가방 집어던지고 기관사 일 끝날 때까지 기동차에 앉아 종점까지 갔을 것이다. 소녀는 기관사의 기동차가 올 시간에 맞춰 기동차를 탔고 기관사 총각은 그녀의 하교시간에 맞춰 배차를 받았을 것 같다. 이 기동차가 다니는 코스는 그녀의 학교 근처였고 종점은 당시 유일무이한 서울의 유원지 뚝섬유원지였으니 안성맞춤 아닌가. 그리고 소녀는 집안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열여덟에 결혼을 했는데 하도 반대가 심해 포천으로 도망가 살았다고 한다.

골목길만큼 깊은 마지막 기관사 삶

사실 기동차 기관사 이현근은 이북이 고향인데 1·4후퇴 때 월남하였다. 단신인 그는 곧바로 군에 입대하였고 곧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 가 총상을 입었고 군병원에 장기간 신세를 졌다고 했다. 총상 입은 몸은 거의 다 나아 병원에서 나와 제대를 했으나 먹고살 길이 막연하였다. 낭만적인 연애담 속에는 천신만고를 겪으며 기동차 기관사가 되어 살아온 얘기가 도시의 골목 안만큼이나 깊이 숨겨져 있다.  


이현근이 살던 집은 옛 기동차(경성궤도)길 상후원역 바로 뒤쪽이었던, 지금의 왕십리로14길(성수동) 중간에 두꺼운 천막으로 지붕을 둘러친 판잣집 같은 건물에 복덕방 간판을 내걸고 있다. 집 오른쪽으로는 가파른 계단으로 뚝 떨어지는 좁은 새끼골목이 나 있고 아래쪽으로는 또 다른 골목이 이어진다. 이 아랫마을은 공단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또 이어지겠지만 옛 기동차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 뚝 떼고 있고, 멀쩡하게 오늘도 사람들과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그 길을 지나간다. 옛 기동차 역인 상후원역 앞쪽에서 기동차 선로는 뚝섬유원지역 방향과 광장리역 방향으로 갈라졌다. 뚝섬유원지역 방향의 선로는 지금의 뚝섬역 1번 출구를 향했고, 광장리역 방향의 선로는 북쪽 방향인 아차산로14길을 계속 따라갔다.  

그는 이 기동차가 폐지되고 선로가 철거될 때까지 일했다. 기동차(경성궤도)는 시내 전차 궤도와 같은 1067㎜로, 일본인에 의하여 건설되었고 당시 예산은 10만엔이었다. 처음 길이 4.3㎞의 출발 구간을 왕십리역으로 삼은 이유는 경원선 왕십리역과 연계하고자 한 것이었다. 화물을 경원선에 연계하거나 받을 목적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경유 동차 3량에 5톤의 적재화물 차량 8량을 보유하였는데 점차 늘려갔다. 여객열차는 정기 15회, 임시 6회, 요금은 5전이었다고 전해진다.

1 마지막 기동차 기관사 이현근씨가 젊은 날 기동차를 몰고 있다. 그는 이 기동차가 폐지되고 선로가 철거될 때까지 일했다. 2 뚝섬유원지에서 이현근 부부의 한때. 3 지난해 7월 필자에게 기동차의 역사에 대해 증언하는 마지막 기동차 기관사 이현근씨. 그는 2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성동역사문화연구소, 김란기 제공

뚝섬, 왕실땅서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아차산로14길을 따라간 기동차길은 중랑천변 상원삼거리를 향하여 달렸다. 이 지역은 1970년대 경공업지대로 개발되어 지금도 공장들이 꽤 남아 있는 곳이다. 기동차길은 광장동을 향해서 계속 달리는데 우선 중랑천변길 바깥쪽을 타고 가다가 중랑천이 휘는 지점에서 이별을 하고 화양사거리로 똑바로 나간다. 그리고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앞을 지나는 광로(광나루로)가 되어 달렸다.  

뚝섬 일대는 조선시대 왕실 소유의 땅(궁장토)으로 일제강점기가 되자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이 소유하게 되었고 대부분 다시 일본인들에게 분양되었다. 일본인들은 과수원 등으로 개발하였고 성수동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다수 모여 살게 되었다. 성수동에 일본식 가옥과 작은 기관들이 모여 산 흔적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뚝섬 또한 조선시대 이후 큰 항구였는데 북한강·남한강의 뗏목 집결지였다. 일제하에서도 내륙 항구로서 큰 역할을 해왔었다. 일제는 이에 착안하여 ‘이천가도’(국도 3호선)를 개설하고 ‘경성궤도’를 허가한 것이다.  

그러던 기동차는 ‘구의정수장’ 앞을 지나 광진교 북단 좀 못 미쳐 ‘광장리역’에 이르러 그 종점에 왔으니 불과 7.3㎞를 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지나쳐 왔을까? 우선 상후원역에서 출발했던 지선의 역들을 차례로 보자면 화양역, 모진역, 구의역, 광장리역으로 이어진다. 이들 역을 지나오면서 만날 수 있었던 것들은 화양역과 모진역 사이의 뒤쪽 ‘군자리골프장’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지도에는 ‘꼴푸장’으로 표기되는 시대도 있었고 산업시대에 와서는 어린이대공원이 되었으니 그 역사를 되짚으면 또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현재도 지하철 구의역이 높다란 고가전철역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지만 그 옛날 기동차 구의역도 있었다. 선로는 구의정수장 남쪽을 빙 둘러 브이(V)자 모양으로 휘어져 종점인 광장리역에 다다른다. 구의정수장은 요즘은 구의야구공원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기동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광장리수원지였다. 이름은 바뀌어왔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기억과 회상, 그리고 역사는 현대 속의 신화처럼 아련하다.

자료협조: 최창준 성동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안내협조: 루미코 오세 한국근대건축연구원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 탐사단 운영 문화유산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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