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

카페 ‘섬’도 이사 가고, 이제 창고극장마저…

명동 골목 (하)

등록 : 2016-11-03 14:09 수정 : 2016-11-0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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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로 창고극장' 앞 카페 '필'마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70년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카페 '섬'에서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70년대를 재현했다. '섬'은 '삼일로 창고극장'과 함께 이어져 왔다.
이제는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붙였던 간판은 찾아볼 수 없다. 그 간판과 함께 카페 '필'도 사라졌다.

‘삼일로 창고극장’ 영영 사라지는 건가. 오늘처럼 가을비 촉촉이 내리면 그곳에 가고 싶다. ‘삼일로 창고극장’이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지만, 세월이 흐르더라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가 살아오며 우리에게 가치를 주고 자부를 준 것들이다. 그것들이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우리 곁에서 사라진다면 너무 허무하다. 문화인들이, 예술인들이 무능해졌다면 오히려 그게 낫다. 자신의 잇속을 채우고 명예를 쌓고 권력을 탐하다가 문예를 잃으면 차라리 기대마저 포기한다.

극장을 구성하는 건축물은 볼품이 없다. 쌩쌩 달리는 큰 도로변 언덕 위에 있으니 인적도 드물다. 그 저녁처럼 스산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더욱 쓸쓸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을 찾았다. 물론 극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창고극장과 함께 삶을 같이해온 작은 카페 ‘섬’에 들려 자가발전 추억들을 꺼내놓고 어둠 속의 노란 백열전등처럼 기억을 살려냈다.

그리고 한쪽 구석 켠에 놓여 있는 통기타를 집어 든다. 그는 그 누군가가 아니고 바로 우리다. 처음에는 중학생처럼 기타 줄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그때 처음 배웠을 ‘로망스’를 튕긴다. 그러자 옆자리 낯모르는 한 분이 끼어든다. 너무 좋단다. 그리고 그 남자의 앞자리에 앉은 여인네가 기타를 하나 더 챙겨 든다. 몇 곡이 앙상블로 흐른다. 그중에는 민중가요에서부터 해태껌, 롯데껌 옛 광고음악, 만화 주제곡까지 나온다.

카페 ‘섬’에서는 서로 아쉬워하며

처음 기타를 집어 든 이가 이제는 극구 사양하며 기타를 놓으려 하지만 카페 안 사람들을 계속해서 한 곡만 더, 한 곡만 더 하고 요청한다. 더불어 이 카페 주인도 기타를 끌어안는다. 7080 음악도, 뽕짝 가요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같이 따라 불러 합창이 되고, 스스로들 늦가을의 희미한 감회에 빠진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지났건만 십수 년, 혹은 수십 년 만에 들어보고 불러보는 이 분위기 속에서 쉽사리 일어날 수 없다. 그사이 출입문 유리창 밖을 드문드문 지나는 사람들 그림자가 슬쩍슬쩍 들여다보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한다.

카페 주인 남자는 드디어 하모니카까지 꺼내 입에 문다.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 고음의 하모니카와 두 대의 기타는 주거니 받거니 깊은 밤을 농익게 한다. 손에 잡힌 기타들은 여전히 고요하기도 하고, 격렬하기도 하다. 우리는 처음 만난 남자들과 이렇게 70년대를 재현했고, 한 달 뒤에 또 만나기로 했다.


삼일로에 면한 명동의 삼일로 창고극장이 폐관된다고 보도되었다. 그것은 벌써 1년 전인 지난해 10월26일이다. <한겨레>는 2015년 10월29일자로 보도했다. 보도를 보면 극장 측은 그동안 적자 누적으로 운영이 어려웠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극장을 찾았다. <한겨레> 보도가 나온 이틀 뒤였다.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유명한 소극장

창고를 빌려 시작했다는 극장은 1975년에 좌석이 100석이었다. 한 해 뒤에 고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추송웅은 일약 스타가 되었고, 삼일로 창고극장은 소극장 실험 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물론 이전의 ‘에저또 창고극장’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삼일로 창고극장은 이후 몇 차례의 부침을 겪게 되는데, 1983년 추송웅이 인수하여 ‘떼아뜨르 추 삼일로’로 개칭한 후, 또 1986년 윤여성 씨로 주인이 바뀌었다가, 1990년부터는 재정난으로 폐관해야 했다.

그러다가 1998년에 다시 ‘복관’을 했는데, 무려 8년 동안이나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사이 극장은 김치공장이 되기도 했고, 인쇄공장이 되기도 했다 한다. 그런 폐관의 위기는 이후 또 찾아왔다. 2003년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 길지 않았다. 폐관 기간이 짧으니 재개관이란 말이 맞을 것이다. 3개월 후인 2004년 재개관한다. 지난해(2015년)에 폐관을 선언한 정대경 대표가 인수해 재개관한 것이었다. (2004년 3월) 그런 삼일로 창고극장이 이제는 영영 폐관되는 것일까?

조선시대 영희전 옆을 지나 구리개(을지로)를 향해 내려가던 길목 언덕이라는 역사 위에 광폭의 삼일대로가 생기면서 실험극장의 발상지가 골목 안이 아닌 대로변 극장이 되었지만, 골목이나 다름없는 언덕 위였던 만큼 소박한 문화 공간이 잠시 깊은 잠에 빠져든 걸까?

명동 2가에는 ‘까뮈’라는 다방이 있었다. 이곳도 70년대(1972년)에 생겨났다. 명동길에서 유네스코회관 옆을 따라 충무로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에, ‘까뮈’에서 한 자음, 한 모음씩 절지당해 ‘가무’가 되어버린, 그러나 아직 건재한 다방을 볼 수 있다. 이 다방은 외래어 표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유신정권으로부터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거세당했지만, 70년대 명동 골목에서 비엔나에도 없는 ‘비엔나커피’를 맛볼 수 있었던, 하지만 이제는 유일한 ‘70년대 대중문화 흔적’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나저나 이제는 카페 ‘필’도 사라졌고 ‘섬’도 이사했다. 지난봄의 일이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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