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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타고 내게 다가온 시

1~9호선 스크린도어 시 2059편 삭막한 도시 일상에 긴 여운 남겨

등록 : 2016-10-13 13:44 수정 : 2016-10-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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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거기에는 시가 있다. 어두운 방 안에 빛을 들이는 작은 창문처럼, 검푸른 바다에 점점이 뿌려진 초록의 섬처럼. 서울 지하철 승강장에서는 2000여 편이 넘는 시를 만날 수 있다. 2호선 시청역을 오가는 시민들이 승강장 안전문에 붙어 있는 송정우 시인의 시 ‘땅콩’을 사이에 두고 스쳐 지나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몇 분 남짓한 시간, 한 편의 짧은 시는 삭막한 도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지난 4일 비교적 이용객이 한산한 평일 오후, 2호선 시청역.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발걸음을 옮기던 대학생 이경민(20) 씨는 “가끔 지하철을 기다릴 때 승강장에 적힌 시를 보는데, 음악과 함께 들으면 무료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한다. 7살 아이와 함께 열차를 기다리던 김문화(38) 씨도 “정신없이 살다보면 책 한 권 볼 시간이 없는데, 지하철 시로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며 웃는다.

서울지하철 승강장 안전문(스크린도어)에 시가 붙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2003년 지하철역마다 승강장 낙상사고를 막기 위한 안전문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당시 안전시설에 불과했던 승강장 안전문에 시를 붙이자고 제안한 이는 김재홍 백석대 석좌교수. 김 교수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공무원들에게 시 문학 강의를 할 때였는데, 지하철에 범람하는 광고물을 줄이고 그 자리에 좋은 시를 붙이면 시민 정서 함양에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었다”며 제안 배경을 밝혔다.

서울시는 2008년 이런 김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승강장 안전문에 시를 써 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36개 역 572곳에 붙였던 지하철 시는 현재 1~9호선, 분당선 299개 역 4840곳으로 늘었다. 작품 수만 해도 2059편이다. 번잡한 일상의 상징 같은 지하철 안으로 들어온 시는 시민뿐만 아니라 시인의 눈에도 경이롭게 보였던 것 같다.


-함민복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중에서

열차가 도착한 것 같아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스크린도어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민망하여 별로 놀라지 않은 척 주위를 무마했다.

스크린도어에, 옛날처럼 시 주련(柱聯)이 있었다.

문 맞았다.

시인은 지하철의 시를 보며 문득 호젓한 산사나 시인 묵객의 사랑방 문앞을 장식하는 시구(주련)를 떠올리며 또 한번 놀란다.

“지하철 스크린도어도 문이지 않은가! 그 문에 시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주련이 떠올라 반가웠다. 책이나 인쇄된 활자보다는 스마트기기만 들여다보는 지하철 풍경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함민복 시인)

김혜정 서울시 문화예술과장은 “시는 짧은 문장으로 마음에 감동을 준다. 바쁘게 오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생각으로 수년째 지하철 승강장 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초 제안자인 김재홍 교수는 “시는 우리의 삶을 표현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숨결들이 시 안에 담겨 있다”고 강조한다.

“시를 문인들의 전유물로 여길 필요는 없어요. 문학은 오히려 사람들의 일상에 더욱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하철에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문학과 대중이 만나는 멋진 현장이지요.”

지하철의 시가 어떤 이의 감성을 자극해 또 한 편의 시를 낳는다. 시를 통해 사람들의 서정이 지하철을 따라 이어지는 것이다.

 

-이상국, <강변역> 중에서

강변역 물품보관소 옆 벽에는

밤눈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추운 노천역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의 바깥이 되어주고 싶다는 시다.

나는 그 시 때문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

<한겨레>에 ‘시인의 붓’을 연재하고 있는 김주대 시인은 “시는 많이 읽힐수록 좋다. 시 전문이 아니어도 괜찮다. 짧은 한 문장을 읽더라도 그 안에 시적 감수성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시적 감수성에 공감하면 할수록 사회가 덜 각박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지하철 시가 늘어나면서 일부 시의 작품성과 선정 방식을 놓고 논란이 불거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지하철 시로 선정된 작품들은 편당 2~3곳에 3년간 게시되어 왔다. 시가 붙인 4840곳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해마다 500여 편의 작품을 새로 교체해야 한다고 한다. 지난해 교체된 작품 편수는 575편. 이처럼 게시 작품이 많다보니 작품의 수준을 고르게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작품 선정 방식에도 논란이 일었다. 현재 지하철에 게시된 시의 65%는 문인단체에 소속된 현역 시인들의 작품들이다. 작년까지는 문인단체별로 추천받은 시를 심사해 선정했는데, 심사위원에 문인단체 관계자가 포함된 것이 또 공정성 시비를 낳기도 했다. 서울시가 선정 방식을 개선한 이유다.

서울시는 먼저 문인단체 추천 방식을 폐지했다. 대신에 평론가·독서지도사 등이 추천하는 애송시를 시민공모작과 함께 붙이기로 했다. 서울시는 올해 ‘시민이 사랑하는 시’로 신경림 시인의 ‘별’, 김용택 시인의 ‘달맞이꽃’, 나태주 시인의 ‘멀리서 빈다’ 등과 릴케의 ‘가을’, 헤르만 헤세 ‘푸른 나비’ 등 외국 유명시도 새롭게 선정했다. 서울시는 시민들이 뽑은 애송시 144편과 시민공모작 132편 등 276편을 올 연말까지 1300곳에 교체해 붙일 예정이다.

윤지혜 기자 wisdo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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