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조선시대 무덤 1천 기 품어 초안산은 더 아늑하다

㉝ 서울시 노원구4 : 불암산 ‘더불어숲’과 초안산, 영축산을 걷다

등록 : 2021-09-09 16:40
조선 서민·양반 무덤 나란히 묻힌 곳

잣나무 숲에 잠든 ‘상궁 개성 박씨’는

아무도 없는 숲에서 홀로 햇살 받는다

근처 문인석 2기, 함께 세월을 지킨다

초안산 숲길. 숲길 옆에 있는 문인석

흰 구름 떠 있어 더 파랗게 보이는 하늘, 살갗을 스치는 매끄러운 바람결, 따사로운 햇볕, 싱그럽고 향기로운 숲의 공기, 실내에만 있으면 죄짓는 것 같은 마음이다. 서울시 노원구 불암산 더불어숲, 초안산, 영축산을 걸었다. 숲에서 만난 사람들은 숲을 닮았다. 불암산 더불어숲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 두 분은 오래된 친구 같았다. 1천 기가 넘는 조선시대 무덤이 있는 초안산은 오히려 아늑했다. 잣나무 숲과 아까시나무 숲은 숲속의 숲이었다. 영축산은 산책로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덕에 활기로 가득했다.

불암산 더불어숲

노원구 중계주공 6단지와 7단지 아파트 그리고 중계본동 51~61 일대를 아우르는 자연 마을 이름이 은행마을이다. 예로부터 은행나무가 많아서 은행마을로 불렀다. 은행마을 동편 위에 있는 마을을 납대울마을이라 불렀다. 나라에 바칠 조공을 모아 놓은 곳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중기에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가 납대울마을에 살았다. 납대울마을은 현재 영신여고 자리와 중계동 75 일대다. 영신여고 남쪽, 빌라와 주택이 빼곡하게 모여 있는 마을에 350년 넘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다. 옛 납대울마을에서 자라나서 지금도 마을을 지키는 은행나무다.

납대울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1㎞ 거리에 불암산 더불어숲이 있다. 공원에 설치된 여러 시설물을 이용해서 모험을 즐기고 협동심을 기르는 놀이공간이자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와이어를 타고 공중을 가로지르는 플라잉 팍스와 집 코스터 등 공원 내 놀이시설은 유료다. 지금은 일반에 개방하지 않고 있다.

불암산 더불어숲 산책로와 놀이시설. 멀리 북한산 능선이 보인다.

불암산 더불어숲을 둘러싼 산기슭에 놓인 데크 길을 따라 걸었다. 커다란 나무 앞 작은 밤나무에 달린 밤송이가 영글어간다.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보인다. 한낮 햇볕은 따갑지만 바람은 선선하다. 피부에 닿은 바람의 결이 매끄럽다. 숲 향기가 싱그럽다. 들숨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신선하다. 같은 서울이지만 도심의 공기와 다르다. 숨이 저절로 깊어지고 커진다.

불암산 더불어숲 서쪽은 충숙공원이다. 데크 길을 따라 걷다보면 충숙공원에 이르게 된다. 같은 숲에 있는 한 공간이다. 충숙공원 한쪽에 충숙공 이상길 묘역이 있다. 충숙공 이상길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가 남한산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순절한 인물이다.

충숙공원 주변은 아파트 단지다. 공원 나무 그늘에 앉아 쉬는 사람들을 지나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향기로운 숲 향기 아래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 두 분이 정겨워 보인다. 두 분은 이곳에서 오늘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을 주고받는다. 숲 그늘 아래라서 그런지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초안산 숲길에서 조선시대 상궁의 무덤을 보다

불암산 더불어숲 입구 도로 건너편에 백사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백사마을을 지난다. 마을의 옛 달동네 풍경은 추억을 되살린다. 좋았던 옛 생각을 떠올리며 중계본동 시내버스 종점에서 큰길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초안산 산길 나들목 초입이었다. 옛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용이 1930년대 후반에 지은 개량한옥인 각심재 앞을 지나 비석골 근린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한쪽에 석물전시장이 있다. 초안산 일대와 노원구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문인석과 동자석, 망주석 등을 이곳에 모아놓았다.

초안산 잣나무 숲 밖 산비탈에 있는 조선시대 상궁의 묘.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서민, 중인, 양반의 무덤과 함께 내시와 상궁의 무덤까지 1천 기 넘는 묘가 있다. 문인석, 비석, 상석, 동자석 등 수백 기의 석물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특히 조선시대 내시의 묘가 모여 있어 초안산을 ‘내시네 산’이라고도 불렀다. 지금도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내시산’이라고 부른다. 서울 초안산 분묘군이라는 이름으로 2002년 사적 제440호로 지정됐다.

석물전시장을 뒤로하고 초안산으로 접어들었다. 정상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멀리 산길 가운데 문인석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주변에 문인석 2기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목이 잘렸다. 초안산 산길을 걷다보면 산길 가운데, 길 옆에, 숲에 서 있는 문인석과 동자석, 상석과 쓰러진 비석 등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안산 잣나무 숲에 도착했다. 숲 속의 숲, 초안산 잣나무 숲 아래에도 무덤과 상석, 비석 등이 널렸다. 잣나무 숲에는 아무도 없었다. 잣나무 숲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걸었다. 그러다 조선시대 상궁 개성 박씨의 묘를 발견했다. 묘는 잣나무 숲 밖 산비탈에 있었다. 깎아놓은 키 큰 잡풀이 햇볕에 마르는 향기가 좋았다. 다시 잣나무 숲으로 들어가 정상 쪽으로 걸었다.

정상 못미처 초안산 스포츠타운 축구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초안산 서쪽 산줄기에서 동쪽 산줄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녹천정과 승극철부부묘를 찾아가는 길이다. 축구장 옆을 지나 초안산생태터널 위를 지나는 길로 접어들었다.

아까시나무 숲을 지나 조선시대 내시 부부의 무덤을 보다

초안산 동쪽 산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걷는다. 초안산 서쪽 산줄기에 잣나무 숲이 있다면, 동쪽 산줄기에는 아까시나무 숲이 있다. 이곳 아까시나무 숲은 25~30년 정도 됐다. 아까시나무 아래층에는 참나무류가 자라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숲의 천이 과정에 따라 아까시나무 숲은 참나무 숲으로 변한다고 한다. 아까시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빨리 자라 10~20년 사이에 무성한 숲을 이루고 20~30년 뒤에는 저절로 생육이 약해져서 다른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고 하니 자연의 순리도 감동이다.

영축산 정상 전망대에서 본 풍경. 북한산과 도봉산이 보인다.

숲과 어우러진 녹천정이 아름답다. 녹천정 아래에 조선시대 내시 승극철 부부 묘가 있다. 승극철은 숙종 임금 때 정6품 내시를 지낸 인물이다.

하산길에 만난 허공바위에는 7개의 칼을 맞고 쓰러져 있던 소를 발견하고 주변 마을 사람들이 산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깃들었다. 당시 산제에 안골, 각심절, 벼루말 사람들이 참여했다. 제를 올린 곳이 허공바위였다. 각심절 마을은 현재 월계2동 600번지. 월계주공 1, 2단지 아파트 일대다. 벼루말과 안골을 아울러 연촌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 광운전자고등학교 부근이다.

허공바위를 뒤로하고 산에서 마을로 내려왔다. 출발했던 마을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해가 남아 초안산 남쪽에 있는 영축산을 가기로 했다.

영축산은 100m가 채 안 되는 낮은 산이다. 데크 길로 조성한 영축산 순환 산책로를 따라 정상 전망대까지 어렵지 않게 오르내릴 수 있다.

옛 납대울마을에 있는 은행나무 고목.

광명교회 부근 나들목으로 접어들었다.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아이가 잘도 걷는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저만치 뛰어갔다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힘들지도 않은 모양이다.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도 보았다. 정상 전망대에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팡이를 짚고 아주 천천히 올라오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혼자 올라오신 할아버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