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고목 찾아 위로 향한 눈길, 아래 보니 ‘작은 풀꽃 세상’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㉖ 서울시 서초구3

등록 : 2021-06-03 15:56
월산대군 태실과 정도전 묘지 찾은 뒤

낮게 핀 꽃과 눈 맞추려 얼굴 낮추니

진한 풀 향기 들숨 따라서 가슴 한가득

작은 개망초 꽃 너머로 숲길도 한가득

서초구 방배동 도구머리공원 북쪽 주택가에 있는 느티나무 고목. 집들이 나무를 에워싸고 있다.

길을 잘못 들어 도구머리공원 숲과 마을의 경계에 난 오솔길을 만난 건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 오솔길을 걷는 유치원 아이들을 마주친 건 아름다운 우연이었다.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이들은 숲마저 치유해줄 것 같았다. 오래된 나무들은 주택가 집들에 에워싸여 있거나 마을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조선 왕족의 태실 숲을 거닐기도 했지만, 그날 마지막으로 들렀던 이름 없는 풀밭에 여운이 남는다. 그곳에 피어난 키 작은 풀꽃 앞에 쭈그려 앉아 풀꽃과 놀다 숲으로 들어간 하루가 있었다.

방배동 도구머리공원 숲과 숲 아래 마을 사이에 난 오솔길을 걷는다.

도구머리 고개 넘어 480년 느티나무를 간신히 보다


관악구 남현동과 서초구 방배동 사이 고갯길이 남태령이다. 관악산이 북동쪽으로 치닫다 잦아들고 우면산이 서쪽으로 흐르다 낮아지는 곳에 사람들이 다니는 고갯길이 생긴 것이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이 남태령을 넘어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의 능을 다녔다고 한다.

남태령 고갯마루는 현재 경기도 과천시와 서울시 서초구의 경계이기도 하다. 서초구청 자료에 따르면 남태령 북쪽에 옛날에 ‘도둑골’이라 부르던 마을이 있었다. 남태령을 넘나들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도적질하던 도둑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도둑골’ 북쪽, 지금의 사당역 부근에는 남태령을 오가던 스님들이 머물던 승방평이 있었다.

승방평 북동쪽에는 도구머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도구머리를 도구두(都口頭)라고도 했는데, 조선시대에 남태령을 넘어 도성(都城)으로 가는 길목 입구(入口)라는 뜻이다. 현재 서초구 방배2동 주민센터 앞에 옛 도구머리마을을 알리는 푯돌이 있고, 그 동쪽은 현재 도구머리공원이다. 사당역 동쪽 서울메트로 교차로에서 뱅뱅사거리까지 이어지는 효령로를 따라가다 보면 도구머리길 입구 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도구머리공원 숲으로 들어간다.

도구머리공원은 동네 앞동산 뒷동산이다. 숲 그늘로 마실 나온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일찍 나오셨다며 인사를 나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아줌마들 웃음소리가 농익다. 동산 꼭대기 마당 한쪽 숲이 열려 있어 밖을 보았다. 도구머리공원 북쪽 풍경이다. 울타리를 친 공사장이 꽤 넓다. 울타리 밖은 주택가에 아파트촌이다.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 길을 걸어 조금 전에 보았던 마을로 내려간다.

숲을 내려서면 도구머리공원 숲을 굽이돌며 이어지는 도구로를 만난다.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걷는다. 도로 왼쪽 마을 골목을 헤맨 이유는, 5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보기 위해서였다. 서울시 자료에 적힌 방배2동 970-27에 있다는 그 나무를 찾아 이 골목 저 골목을 드나들었다. 그 와중에 만난 도구머리공원 숲과 마을의 경계에 난 오솔길은 뜻밖에 얻은 풍경이었다. 그렇게 헤매다 가까스로 그 나무를 찾았지만 주택가 건물에 에워싸여 고목의 온전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서초구 우면동 태봉산. 조선시대 성종 임금의 형인 월산대군의 태실이 있다고 해서 태봉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식유촌과 형촌에 있는 회화나무 고목들, 그리고 조선 왕가의 태실 숲

마을 밖으로 나와 서초05 마을버스를 탔다. 이수역에서 서초14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서래마을 입구 정류장에서 내렸다. 사평대로 26길로 들어서서 조금 가다보면 작은 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에 390년 넘게 살고 있는 은행나무가 있다. 옛날에 이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평안과 사람들의 안녕을 빌며 동제를 지냈던 곳이다. 점심시간에 공원을 찾은 사람들을 위해 젊은이들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 공원은 그렇게 쉼표가 된다.

반포동 12에 있는 350년 넘은 느티나무는 공사장 울타리에 가려 보지 못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서초호반써밋 정류장에 내려 식유촌길로 접어들었다. 버드나무를 많이 심어서 식유촌(植柳村)으로 불린다는 유래를 확인하고 마을 길을 걷는다. 버드나무는 잘 보이지 않고 길옆 텃밭이며 집 울타리 안마당 텃밭에 싱싱하게 자라는 채소가 눈에 띈다. 마을 사람 몇몇이 운동기구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식유촌 공원을 지나는데, 평범하지 않은 나뭇가지가 담장 위로 솟은 풍경을 보았다. 370년 넘은 회화나무였다. 광복되던 해인 1945년에 나무에서 구렁이 4마리가 나와서 사방으로 사라졌다는 전설을 간직한 나무다.

식유촌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1㎞ 거리에 형촌마을이 있다. 형촌마을 입구 마을 유래비에 1640년쯤 풍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고 새겨졌다. 가시덤불이 많아서 가시내꿀이라고도 불렀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초입에 동산이 있다. 조선시대 성종 임금의 형인 월산대군 이정의 태실이 있어서 태봉산이라고 불린다.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실이 나왔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서울에서 원형 그대로 원래 위치에 남아 있는 보기 드문 태실이다. 석함과 비석만 남아 있다. 태를 봉안했던 태항아리와 지석은 일본 아타카 컬렉션에 있는데, 언제 누가 도굴해서 반출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태봉산에서 내려와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마을 안 형촌7길 어느 골목 가운데에 우뚝 선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240년 정도 된 회화나무다. 나무 아래 돌로 만든 동자상이 있다. 누군가는 미륵이라고 부른다. 미륵 동자상이 고목을 보고 있다. 고목은 가지를 넓게 퍼뜨려 그늘을 만들어 미륵 동자상을 품고 있다.

우면동 바우뫼마을에 있는 470년 정도 된 느티나무.

정도전 산소 터를 알리는 조형물 앞 풀밭에서 풀꽃과 놀다

형촌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1㎞ 거리에 바우뫼(암산)마을이 있다. 우면치안센터 앞 도로 가에 바우뫼마을의 유래를 알리는 비석이 보인다. 마을 북쪽에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어 호암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에 바위가 많아 바우뫼(암산·岩山)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호랑이가 마을을 지키고 있어서 마을이 평온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남겼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 안 골목길을 걷다가 암산어린이공원에서 470년 정도 된 느티나무를 만났다. 작은 공원 한쪽에 푸른 가지를 넓게 드리운 느티나무 고목과 알록달록한 미끄럼틀이 어울려 하나의 풍경이 된다. 코로나19로 아이들 하나 없는 미끄럼틀이 심심해 보인다. 올해도 어김없이 푸른 잎을 피워낸 470년 넘은 고목이 그 옆을 지킨다.

바우뫼마을에서 직선으로 약 700m 거리에 말죽거리공원이 있다. 그 북쪽에 서초구청과 양재고등학교가 자리 잡았다. 그 부근에 고려 말 학자이자 정치가로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문을 연 정도전의 산소 터를 알리는 조형물이 있다.

조형물에 ‘동국여지지 과천현편 정도전묘재현북동십팔리(鄭道傳墓在縣北東十八里) 양재역재동십오리(良才驛在東十五里)’라는 구절이 새겨졌다. 서초구는 <동국여지지>에 나오는 내용을 들어 정도전 산소 터를 알리는 조형물 주변에 정도전의 산소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말죽거리공원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 풀밭 한쪽에 자리 잡은 정도전 산소 터를 알리는 조형물이 소박하다. 세 개의 봉우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에 ‘삼봉 정도전 산소 터’라는 글과 함께 ‘민생의 안정과 풍요를 정치의 최고 가치로 삼았던 정도전의 산소가 이곳 서초에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삼봉의 민본사상을 기리는 빗돌을 세운다’는 내용을 새겼다.

눈길을 거두고 풀밭에 앉았다. 키 작은 꽃이 하얗게 풀밭을 메웠다. 낮은 곳에서 피어난 꽃들과 눈을 맞추려 풀밭으로 얼굴을 낮췄다. 진한 풀 향기가 들숨을 따라 들어와 가슴에 퍼진다. 개망초 한 포기가 꽃을 피웠다. 그 뒤로 숲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겹쳐 보인다. 숲으로 들어갔다.

정도전의 묘 터 푯돌 앞 풀밭에 핀 개망초꽃.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