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4차 산업혁명에서 한국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

서울-모스크바 교류 30년 기획연재 ④ 눈을 들어 북방을 보자…‘러시아 재발견’이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 만든다

등록 : 2020-09-24 14:40
나로호·한국형 미사일, 러시아 도움 커

김치냉장고·전기밥솥도 러 기술 이용

러시아 원천기술료, 미국의 단지 2%

그러나 한국의 러시아 인식, 색맹 수준


새 지평 여는 데 서울의 역할 매우 중요

서울-모스크바 결연 30주년인 2021년

모스크바-서울 시민, 어깨 겯고 춤추며


‘두 나라의 새 시대’ 이정표 함께 세우자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이 2015년 9월1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과 러시아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사진교실에 참가한 양국 청소년들이 카잔성당 앞에서 셀카 사진을 찍고 있다.

트리즈(TRIZ)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1960년대 소련의 엔지니어 겐리흐 알트슐레르와 그 제자들이 정립한 ‘창조적 문제 해결 이론’(theory of solving inventive problem)이다. 설정된 문제에 대한 이상적 결과를 정의하고, 그 결과를 얻는 데 관건이 되는 모순을 찾아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얻어내는 마흔 가지 방법에 대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현재 삼성, 엘지(LG), 포스코, 도요타, 보잉 등 대다수 다국적 기업들이 연구개발 부문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계에 이 이론에 관한 76명의 마스터가 있는데, 모두 러시아인이다. 이는 연구개발과 발명, 기술 문제 해결 부문에서 소련 시대부터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러시아의 역량을 말해주는 인상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2013년 1월 전남 고흥에서 발사된 우주발사체 ‘나로호’가 발사장 건설과 로켓 제작 등에서 러시아의 기술 지원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 한국인 최초 우주인 배출 사업이 러시아의 지원으로 가능했다는 사실, 천궁과 신궁 같은 ‘한국형 미사일’이 러시아의 유도 조정 센서 등 핵심 기술을 도입해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가 애용하는 김치냉장고가 러시아의 탱크 냉각 시스템 기술을 도입해서 성공한 것이고, 휴대폰 통화 잡음 제거 기술은 러시아의 통신 기기와 레이더 잡음 제거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며, 에어컨의 결로 방지 기술은 러시아의 위성 표면 처리 기술을 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놀라지 않겠는가? 구체적인 품목을 나열하자면 한이 없다. 전기밥솥에서 치아 미백까지, 곡물건조기에서 액체렌즈, 복강 내시경, 레이저 암 치료기, 자율주행차용 고성능 레이더 등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이 제공한 커다란 기술적 도움으로 우리가 혜택을 보게 된 문명의 이기들이 한국인의 직장과 집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와 사회생활에 이렇게 의미 있는 사실이 소수 전문가 외에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러시아인과 협력한 덕분에 엄청난 수익을 내면서도 그런 일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은 대기업들, 러시아의 기술 지원이라고 하면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강한 서구 지향성을 지닌 주요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의 러시아 인식은 거의 색맹 수준에 머물게 됐다.

과학기술 분야와는 거리가 먼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필자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까닭은 한국인의 바깥 세계 인식이 너무나 편협하게 지속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서울이 모스크바와 협력해 얻은 성과가 이렇게 큰데도 러시아를 말로만 ‘주변 4강’이라 하고 실제로는 ‘주변부 4강’ 정도로 치부하는 중앙정부의 대외정책이 너무나 한심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향후 세계 각국의 운명을 좌우할 4차 산업혁명에서 한국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가 누구일까? 미국과 유럽의 높은 장벽에 비해 러시아는 한국과의 기술협력에 가장 개방적이다. 2006년 한국은행의 기술무역통계조사에 따르면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원천기술을 러시아에서 도입했을 때 그 가격은 단지 미국의 2%(!)에 불과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1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수학, 물리학 등 탁월한 기초과학 수준을 자랑하는 러시아는 4천여 개의 연구기관과 100만 명 이상의 고급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대표적 정보통신(IT) 기업인 얀덱스(Yandex)는 2011년에 이미 택시 호출 모바일 앱 서비스를 시작했다. 서울보다 4년이나 앞섰다. 러시아에서는 2014년 푸틴 대통령이 4차 산업혁명 관련 계획을 언급하고, 2016년 4차 산업혁명 프로그램 실행 계획을 담은 전략보고서가 승인됐다. 한국의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출범한 것은 2017년 10월이다.

이제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때다. 한국에 그것은 러시아를 비롯한 북방대륙이다. 우리는 이미 30여 년 전 냉전의 높은 벽을 뚫고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을 만났다. 잠실경기장의 관객은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한 모스크바팀의 경기에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서울과 모스크바가 스포츠 교류를 시작했고, 역사적인 ‘한-소 수교’를 이루어냈다. 당시라고 해서 한국의 군사주권을 보유하고 한국의 대외정책에 압도적 영향을 미치던 초강대국 미국이 어디로 사라지고 없던 상황이 아니었다. 문제는 발상의 전환이다. 러시아가 한국의 미래와 한반도의 평화 구축 과정에서 ‘주변 3강’과 구별되는 상당히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파트너라는 인식이 서울의 여론주도층과 정책결정자들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벌써 절반 이상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한국의 대외정책 결정 공간에서는 친미 세력이 압도하고 친중 세력이 그것을 일부 견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남북 대화를 적극 지지하고 한반도에서 어느 한 나라의 일방적 패권을 반대하는 러시아를 균형외교의 지렛대로 삼는 영리한 외교 역량 증대가 절실한데도 그것을 깨달은 주요 인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정치적 주권의 부족 이전에 세계 인식에 대한 주권 결핍이 심각한 중앙정부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국제적 교류협력의 또 다른 주체인 지방정부, 특히 서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단지 일회성 방문 행사의 상투성을 넘어 서울-블라디보스토크-모스크바를 잇는 ‘동북아/유라시아 공동체연구소’를 세우자. 북한의 바로 위 러시아의 극동·시베리아 지역에서 한국의 발전모델을 21세기 조건에 맞게 창조적으로 변형하는 실험을 제안해보자. 여기에는 서울연구원을 비롯해 두 도시의 연구자와 정책 관계자들의 긴밀한 협력이 요구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서울시가 축적해온 앞선 행정 경험의 전수가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서울-모스크바 상호결연 30주년이 되는 2021년 가을쯤에 서울광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세계 영화사에 남은 톨스토이 원작 영화 <전쟁과 평화>를 7시간 동안 상영하는 것은 어떤가? 서울의 푸른 광장에서 쇼스타코비치의 흥겨운 왈츠곡에 맞춰 한국인과 러시아인 수천 명이 잔디밭에서 춤추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도 한국 영화가 상영되고 아리랑에 이어 젊은 한국 음악인들의 신나는 노래가 울려 퍼지면서 모스크바 시민과 서울시민이 어깨 겯고 춤추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장관이 아니겠는가? ‘서울의 날’과 ‘모스크바의 날’은 그렇게 두 도시, 두 나라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다.

김창진 성공회대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