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장인정신과 젊은 아이디어, 새로움을 만들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⑲ ‘힙지로’가 된 을지로

등록 : 2020-09-10 15:20 수정 : 2020-09-10 17:31
조명거리, 목재거리 상가 즐비한 곳에

작업실 마련한 젊은이 크게 늘어나며

오래된 거리가 힙한 곳으로 변신 성공


골목길마다 이들 반기던 골뱅이 가게

코로나 탓, 열기 사라지고 시름만 남아

나에게 을지로3가는 혀로 기억되는 곳이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을지로에 있던 작은 공구상점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불고기와 냉면을 팔던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물론 냉면의 맛을 아직 모를 때여서 우리는 정신없이 불고기와 밥으로 배를 채웠다. 친구들 앞에서 아들 체면을 세워주었던 그 식당이 어디인지, 아버지의 작은 상점 위치가 어디쯤 되는지 정확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을지로3가는 언제나 혀끝에 스치던 달콤한 불고기 맛으로 남아 있다.


지금 나는 그때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들었고 오래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을지로3가는 그사이 ‘힙지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탈바꿈했다. 새롭고 개성이 강한 을지로란 합성어다. 본격적인 지역 탐방을 위해 지하철 을지로3가역에서 내렸다. 원래 계획은 1번 출구로 나가려 했는데, 지하통로에 ‘메이드인 을지로’라는 유리 진열대가 눈길을 끌었다. ‘공구,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곳’이란 안내와 함께 망치, 펜치, 톱, 드릴같은 공구들이 진열장 안에 가득했으며 이 동네 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을지로운 창작생활’이란 이름의 전시에는 최근 을지로에 작업실을 마련한 창작하는 이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작업의 모든 공정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인프라적인 측면과 비용 경쟁력을 장점으로 꼽았다. 아트 디렉터와 그래픽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읽어본다.

“을지로3가의 조명거리, 충무로 인쇄소, 을지로5가의 목재거리와 방산시장 등 일대의 재료, 가공소를 이용할 줄만 안다면 최적의 장소입니다.”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곳이기에 고객과 미팅하기에 좋습니다. 단점이라면 철공소의 먼지, 실크인쇄의 화학약품 냄새, 아크릴 냄새가 자극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을지로3가역 구내 전시

그렇다. 이곳은 서로 다른 것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교차하고, 나이 든 아저씨들과 청년 그룹이 교차하고 냉면과 화학약품 냄새가 교차하는 곳이다. 평생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기술로 잔뼈가 굵은 나이 지긋한 이의 장인정신과 독립 아티스트의 산뜻한 아이디어가 공존하는 곳이 바로 을지로 골목길이다. ‘7켤레에 5천원’이라는 양말가게와 명함가게, 사주 타로와 로또복권 가게 등이 서 있는 지하상가에서 1번 출구로 나왔다. 을지로의 큰길 건너 파인애비뉴 건물 앞에 ‘아틀라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조형물이 보인다. 이 조형물이 을지로의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새로운 이정표다.

파인애비뉴 앞의 ‘아틀라스’. 을지로의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이곳에서 을지로 입구 쪽 방향으로는 금융기관과 대형 빌딩이 많이 몰려 있지만, 을지로3가 이후로는 전통적으로 소상공인과 재래식 골목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이 재래식 골목에 작업실을 마련한 젊은이가 크게 늘면서 동네 풍경이 바뀐 것이다. 아틀라스에서 백병원 방향으로 한 발짝만 들어서면 골목길마다 인쇄와 관련된 작은 업소들이 몰려 있고, 저녁때는 을지로골뱅이골목으로 변신한다.

다시 1번 출구 쪽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면, 타일과 도기 같은 건축재료를 파는 상점과 조명기구 전문점이 많다. 지하철 출구 옆에 샌드위치 체인점 ‘서브웨이’도 보인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근처 백반집에서 저렴한 백반을 시켜 먹는 것을 선호한다면, 서브웨이는 이 동네에 새로 작업실을 마련한 청년들의 사랑을 받는다. 을지로의 미각이 여전히 아재들 중심이기는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젊은 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증거다.

낮의 을지로와 밤의 을지로는 확연히 다르다. 석양이 진 뒤 ‘을지로노가리골목’에 들어가 보면 그 장엄한 장면을 목격한다. 지하철역 2번과 3번 출구 사이, 스타즈호텔 부근 골목길에는 만선호프, 원조 만선호프, 을지로 OB베어 같은 맥줏집들이 있고 그 앞에는 시원한 밤공기와 노가리와 먹태를 안주 삼아 맥주 한잔 즐기는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팬데믹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동네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진다면 다시 그 열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을지로노가리골목 풍경(코로나 재확산 이전 모습)

이곳에서 지하철역 5번 출구 앞으로 건너가면 유명한 냉면집 을지면옥이다. 재개발로 철거된다는 뉴스에도 불구하고 근처에는 ‘재개발 결사반대’ 펼침막이 걸려 있다. 그 어수선한 틈 사이로 냉면집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입구에는 <오도민신문> <황해민보> 같은 낯선 신문들이 비치돼 있다. 전통적으로 을지로와 충무로는 냉면 동네다.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 을지로4가의 우래옥, 충무로역은 필동면옥, 그 중간에 오장동 함흥냉면거리가 있으니 확실히 혀가 살아 있는 곳이다.

허름한 외경의 을지면옥 입구

을지면옥에서 나와 충무로를 따라 지하철역 10번 출구 뒤쪽, 충무로 7길로 가면 그곳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인쇄와 아크릴 명판 가게 옆에는 요즘 한창 인기를 누리는 색다른 분위기의 와인바 ‘르템플’이 있고, 9번 출구 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허름한 건물 2층에 이름도 재미있는 ‘소규모와인바’가 있다. 역시 팬데믹 사태로 타격을 입은 골목이다. 을지로 골목길에서는 지도를 손에 쥐고도 목적지를 찾기 쉽지 않다. 미로인데다 재래식 건물에 뒤섞여 있고 때로는 간판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매력 때문에 을지로를 가리켜 힙지로라 하는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찾는 것은 젊은 세대에게는 하나의 게임과 같으니까.

을지로3가 골목길의 ‘소규모와인바’

날은 어두워졌는데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어느 상점 앞에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코로나 사태로 수입이 뚝 떨어져 생활비를 대주지 못해 초조해하는 얼굴이다. 아마도 지금 세상의 아버지들 마음이 대부분 비슷하리라. 그가 뿜는 담배 연기 속에서 애연가였던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장사가 안되어 결국 가게를 접어야 했던 아버지의 불안감과 좌절감, 무력감 섞인 얼굴이다. 허공의 담배 연기처럼 아버지는 잠시 왔다가 사라졌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