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포비아’라는 색안경 벗고 러시아를 보자!

서울-모스크바 자매결연 30년 기획연재 ② 유럽인이 찍은 오랜 낙인, ‘한국 이익과 한반도 평화’ 관점에서 극복해야

등록 : 2020-09-10 14:58
서울-모스크바는 서로 관심 없는 나라

한국 20대, ‘러시아 무관심’ 65% 기록

‘주변 4강 러시아’ 활용 마인드도 낮아

서울에 만연한 ‘루소포비아’가 큰 영향


러시아 혐오는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

나폴레옹 격퇴 뒤 유럽의 공통 전략 돼

서방 매체, ‘이데올로기 수준’ 확산 주범


그 수렁 벗어날 때 한국 외교 새 지평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거리에 있는 러시아어 간판이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서양 중심 시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혐오증(루소포비아) 탓에 러시아의 이미지가 실제보다 크게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 속 선부동 거리는 러시아에 살다 귀국한 고려인이 많이 사는 곳이다.

최근 발표된 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 이후 30년 동안 양국 교역량은 1990년 8억8천만달러에서 2019년 223억4천만달러로, 두 나라를 오간 여행자 수는 같은 기간 3만 명에서 77만 명으로 약 25배씩 늘었다고 한다(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동토의 땅’으로 불리던 소련과 우리가 한 세대 만에 이런 관계를 이루어냈다니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서울과 모스크바는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는 사이’다. 2016~2017년 진행된 양국 합동 여론조사 결과 상대국을 ‘모르거나 관심 없는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한국인의 55%와 러시아인의 66%로, ‘신뢰도 없고 반감도 없는 중립적 관계’라는 인식이 각각 약 60%와 50% 전후를 차지했다. 한국인 응답자 중 두 나라가 우호적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3분의 1이 넘고, 한국의 20대 중 러시아를 ‘잘 모르며, 별 관심이 없다’는 비율이 무려 65%로 나타났다(한국외대, 프치옴/한국리서치).

미국, 중국,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선호도는 조사 당시 양국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민감하게 반영하여 의미 있는 진폭을 보인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해서만큼은 꾸준하게 ‘무관심’이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가 ‘주변 4강’이 맞는가?

이렇게 서울에서 모스크바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지고 잘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은 경종을 울려 마땅하다. 동유럽에서 태평양에 걸쳐 세계 최대 영토를 보유하고 15개 국가와 접경한 유라시아 국가인 러시아에 한국은 극동의 주요국이지만, ‘주변 4강’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통상 관계, 외교·안보 관계, 한반도 평화구축 전략에서인접국 러시아는 매우 중요한 파트너다. 한반도의 생존과 미래가 ‘현명한 외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진 지난 3년 동안 생생하게 겪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설치하고, 2017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동방경제포럼에 참가했다. 2018년 6월에는 김대중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를 국빈방문했다. 한국의 철강 관련 주가가 일제히 올랐다. 남북러 3각 가스관 협력사업에 대한 높은 기대심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이 지난 지금, 현 정부의 ‘신북방정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정부 관료와 기업인이 몇 명이나 될까?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미국에 밟히고 중국에 뺨 맞으면 급하게 찾아가는 나라가 러시아인가? 19세기 말 청나라 외교관이 쓴 <조선책략>에 농락당했다가 ‘아관파천’으로 대한제국의 국운을 러시아에 내맡긴 희비극을 21세기에도 되풀이할 것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서울에서 색안경을 끼고 모스크바를 보기 때문이다. ‘루소포비아’라는 유령이 한 세기 넘게 서울을 배회하고 있는 탓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서구가 자신들의 대외전략상 이익을 위하여 거대한 도전자에게 찍어놓은 낙인, 즉 ‘러시아 혐오증과 공포증’의 중독으로부터 한국인이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초반 러시아제국이 나폴레옹을 패퇴시키고 일약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이래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되찾고자 하는 서구 국가들에 루소포비아는 러시아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국제사회의 참여를 배제하는 공통의 상설 전략이 되었다.

그것을 가장 확연하게, 끈질기게, 직접 반영하는 것이 바로 대중매체이다. 러시아와 관련된 국제 뉴스를 다루는 서방 측 언론에서 러시아 혐오와 비방은 상투성을 넘어 거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2020년 러시아 백신 개발에 이르기까지 영미권 매체의 보도는 일방적이고 부정적 논평 일색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동부의 러시아계 주민들에게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한 키예프 정부의 부당한 조치가 발단이 된 것이었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영토였던 크림 주민의 90%는 러시아로 ‘합병’되기 전에 두 번씩이나 자발적으로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 투표’에 찬성했다. 2002년 위버링겐 상공 항공기 충돌사고, 2004년 베슬란 인질극, 2008년 남오세티야와 그루지야(조지아)의 무력충돌, 2014년 소치 올림픽 보도에서 서구 언론은 이성을 잃고 사실을 왜곡했다. 구체적 사실에 대한 탐구는 뒷전이고 최소한 기계적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조차 사치로 보일 지경이다.

영국과 미국의 티브이(TV) 드라마, 할리우드 영화에서 러시아인은 변함없이 스파이와 마피아로 ‘악당’ 역을 도맡는다. 주인공들 대사에서 뜬금없이 호출되는 러시아인은 비방과 조롱의 안줏감으로 맞춤이다. 대중의 의식에서 ‘소련러시아적’으로 보는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루소포비아는 미국과 서유럽이 국제사회에서 러시아라는 강력한 상대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묶어 놓고 그 행동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는,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이다. 중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로부터 시작된 천 년의 심리전은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응해 러시아도 서구를 ‘상업적으로 타락하고 위선적인 문명’이라는 프리즘으로 보게 됐지만, 그 효과는 국제적이라기보다는 대개 러시아 국내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루소포비아가 우리에게도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그렇다. 우리가 가진 고정된 인식틀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그렇게 취사선택된 정보에 근거해, 자신이 의식하건 못하건,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와 전략의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국가의 대외정책을 책임진 고위 관리들의 정책 결정과 집행은 바로 이런 전략의 결과이다. 따라서 정책결정자들이 어떤 정보를, 어떤 시각에서 받아들이고 판독하는가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성향의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영미권 매체의 러시아 보도를 거의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한국의 지식인 대다수는 루소포비아에 깊이 젖어 있는 영미권 학자들의 주장을 가감 없이 반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동북아’와 ‘한반도 주변국 학술회의’에서 러시아는 번번이 제외된다. 만약 <뉴욕 타임스>와 <시엔엔>(CNN), <포린어페어스>의 논평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서울-모스크바의 관점에서 본다면 워싱턴-베이징의 경쟁과 갈등도 새롭게 보일 것이다. 영어만이 아니라 러시아어로 정보를 습득하고, 한국의 국가이익과 한반도 평화의 관점에서 그런 정보를 해석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언론인과 외교관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만 한다.

‘한국에 러시아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과 고민이 언론인과 외교관, 최고 정책결정자들에게 존재하지 않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직접 생산하거나 외부의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의 일극 패권을 저지하는 러시아의 국제적 역할이 눈에 들어올 수도 없고, 한국과 한반도 외교의 운신 폭을 넓히는 데 러시아라는 거대한 자원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 자, 이제 루소포비아라는 외제 색안경을 벗고 우리의 눈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김창진 성공회대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