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아파트’, 나비 그림 우편함으로 화합

1971년 건립된 중림동 성요셉아파트의 따뜻한 변신

등록 : 2020-07-09 16:51 수정 : 2020-07-10 14:40
녹물 수도, 누수, 소통 부재의 마을

복지관·재생센터·중구청이 도움줘

우편함, 소통·화합의 첫 단추 구실

우편물 나누며 서로 안부 확인도 가능

중구 중림동 성요셉아파트 현관 입구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다양한 나비와 꽃이 그려진 우편함이 있다. 아파트 주민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든 이 우편함은 주민들 사이 해묵은 갈등을 끝내고, 화합과 소통을 알리는 ‘상징물’이 됐다. 2일 성요셉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휑하고 삭막했을 것 같은 낡은 아파트가 우편함 때문인지 밝고 화기애애하게 느껴졌다.

“너무 예쁘고 편해서 좋아요.”

문양덕(68) 성요셉아파트 주민대표는 “우편함을 잘해놨다고 칭찬하는 주위 사람들 말이 듣기 좋다”며 웃었다. 우편함을 만들기 전에는 아파트 관리인이 집집이 다니면서 우편물을 전달해야 해 무척 불편했지만, 우편함을 만들고부터는 관리인의 일도 줄어들고 우편물을 분실할 염려도 없어졌다고 한다.

성요셉아파트는 1971년 국내 최초의 복도식 주상복합아파트로 지어졌다. 아파트는 서소문로6길의 굽은 비탈길을 따라 길게 휘어져 있어, 언덕 아래쪽과 위쪽의 건물 층수가 서로 다른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성요셉아파트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미래유산로 지정됐다.


지은 지 50년이나 된 성요셉아파트는 주민대표를 새로 선출하기 전에는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많았다. 10년 동안 회장이 여러 명 바뀌면서 아파트 관리비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급기야 주민대표를 맡았던 안아무개씨가 아파트 공금 3천만원가량을 횡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파트 주민대표단에 대한 주민들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주민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성요셉아파트는 고령자 비율이 높은데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주민이 많고 서로 소통도 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을 알고 중림종합사회복지관과 서울역일대 도시재생지원센터, 그리고 중구청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성요셉아파트 주민들은 2018년 4월, 문씨를 새 주민대표로 뽑았다. 문씨는 “처음에는 칠십 먹은 할머니가 어떻게 주민대표를 하느냐며 못한다고 했지만 복지관도 도와주겠다고 해 맡게 됐다”고 했다.

문 대표는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서울역일대 도시재생지원센터와 함께 아파트 문제를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 복지관과 도시재생 주민협의체가 주민 변화를 이끌고 중구청에서도 힘을 보탰다. 노인 비율이 50% 넘는 오래된 아파트에 공동체 문화가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현영주 중림종합사회복지관 과장은 “수도관 녹물이 나오는 등 주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관리체계도 미흡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복지관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고 했다.

새 주민대표가 선출된 뒤, 성요셉아파트 주민들은 매달 반상회 등 주민 모임을 열었다.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오해를 풀고 서로 화합하는 자리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다. 아파트 주민들은 2018년 7월 ‘삼계탕 데이’를 열어 삼계탕을 나눠 먹으며 서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주민들의 다양한 요구와 의견이 쏟아졌다. 그중에서 녹물이 나오는 수도관, 방수가 안 되는 옥상, 단절된 주민들 사이의 소통에 대한 얘기가 가장 많았다. 이 세 가지는 성요셉아파트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오래된 숙제였다.

‘우편물을 배달하기 불편하다’는 관리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주민들은 먼저 우편함을 만들기로 했다. 우편함을 만드는 비용은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을 신청해 마련했다. 주민들은 2018년 11월 지역에서 활동하는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 ‘막쿱’의 도움을 받아 각종 나비와 꽃을 그린 우편함을 만들었다.

“우편함은 성요셉아파트에 사는 주민들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역할도 하죠.”

문 대표는 “우리 집 우편물뿐만 아니라 이웃집 우편물도 꺼내서 전달해 주면서 서로 안부를 물어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우편함만 확인해도 대부분 고령자인 주민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김수현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주민동행과 중림소공팀 대리는 “성요셉아파트에는 혼자 살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많은데, 사회복지사들이 매일 들여다보기 어렵다”며 “주민들끼리 서로 관심을 갖고 함께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보기 좋다”고 했다.

성요셉아파트 주민들은 2019년 1월, 그토록 바라던 낡은 수도관을 바꿨다. 녹물이 나오는 수도관을 뜯어보니, 오래된 수도관에 녹이 많이 슬어 있었다. 녹물도 문제였지만 ‘수도 요금’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성요셉아파트 65가구가 수도계량기 한 개를 공동으로 사용한 게 원인이었다. 관리사무소는 수도 요금이 나오면 전체 사람 수로 나눈 뒤, 세대별 인원수대로 수도 요금을 받았다.

문 대표는 “사람이 많아도 적게 쓸 수 있고, 혼자 살아도 많이 쓸 수 있는데 항상 말썽이 많았다”며 “수도관 공사를 하면서 계량기도 가구별로 설치해 이 문제가 해결됐다”고 했다.

각 가구 내 수도관을 교체하는 데는 개인이 비용을 감당해야 했는데, 이를 중구청에서 해결해줬다. 총무를 맡은 김순자(59)씨는 “횡령 사건으로 아파트에서 적립한 돈도 없었고 경제적 여유가 없어 개인 부담이 컸는데, 서양호 중구청장이 해결책을 마련해줘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성요셉아파트는 지난해 일부 옥상 방수 공사를 진행했고, 올해 나머지 공사를 할 예정이다. 완공되면 넓은 옥상에서 다양한 주민 행사도 계획하고 있다. “돌봄이웃이라는 말 있잖아요. 같이 사는 주민들끼리 서로서로 돌보는 게 가장 좋은 거잖아요.”

김수현 대리의 말처럼, 성요셉아파트의 우편함은 오늘도 주민들끼리 서로 살피고 알아가고 환경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2일 중구 중림동 성요셉아파트의 우편함 앞에서 문양덕 주민대표(왼쪽), 박양자 총무(가운데), 김수현 중림종합 사회복지관 대리가 팔을 뻗어 하트 모양을 그려 보이고 있다.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