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되어 공원을 걸었다, 130년 역사가 다가왔다

전유안 기자의 ‘근대공원 걷기-장충단공원’ 편 참가기

등록 : 2020-06-18 14:04 수정 : 2020-06-23 17:49
‘…근대공원 산책’ 쓴 김해경 교수 인도

을미사변 희생자 기리는 장충단 답사

일제 때 벚나무 심어 공원으로 변했지만

함께 걷는 발걸음에 역사 숨결 느껴져

장충단공원 일대는 ‘민족공원’ 위상이 돈독히 쌓인 곳이다.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 유관순 열사와 이준 열사, 사명대사 동상 등이 공원에 있다. 1970년 세운 유관순 열사 동상은 오늘날엔 ‘닮지 않은 얼굴’이 도리어 입에 오르내린다.

“앞서 본 유관순 열사나 이준 열사 동상 모두 코가 크죠. 이목구비가 굵직굵직한 모습이 마치 서양인 같습니다. 왜일까요?”

지난 6일 토요일 오전, 장충단공원이 지척인 동대입구역으로 답사객들이 모여들었다. 20명가량 됐다. 마스크로 무장하고 적당한 거리를 만들었다. 어쩐지 비장감도 서려 보였다. 뙤약볕 속 3시간 가까운 행군에도 낙오자가 없었다.

현충일을 맞아 역사책방(대표 백영란) 주최로 열린 ‘근대공원 걷기-장충단공원’ 편에 참가한 시민들이었다.


<모던걸 모던보이의 근대공원 산책>(2020, 정은문고 펴냄)을 쓴 경기도 문화재위원이자 건국대 생명환경과학대 녹지환경계획학과 김해경 교수가 앞장서며, 오늘날 지형과 1930년대 지형을 겹친 지도를 나누어줬다.


유월에 유독 빛나는 장충단공원

코로나19 탓에 침체한 답사 열기 속에서도, 장충단공원을 걷는 시민들이 적극적인 건 이유가 있다. 유월에 장충단공원은 유독 빛이 오르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망종을 지나 낮이 가장 긴 하지로 넘어가는 시기, 태양이 대지를 본격적으로 달구면 새로운 초록이 차오른다. 무엇보다 1900년 장충단을 꾸민 고종의 뜻이 호국의 달과 맞아떨어진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철거한 수표교(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이전 모습.

땡볕을 피해 모인 동네 어른들이 냇가에 유유자적 발을 담그기도 하고, 근처 동국대 학생들이 찾는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한 이곳은 원래 공원이 아니었다. 애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병사·관료들을 기리기 위한(장충·奬忠) 제단이 있던 곳이다.

장충단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 주변에서 김해경 교수와 답사객들이 숨을 고르고 있다.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희생된 장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9월 세워졌다. 을미사변 때 희생된 병사와 함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나 1882년 임오군란 때 숨진 장졸들도 함께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한양도성 남쪽을 수비한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다. 1897년 대한제국이 출범했지만 여전히 국내외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 군인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제단을 만들어 이들의 충심을 기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과 관리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충단은 일제의 강점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일제강점기 박문사 터에 지은 신라호텔 영빈관은 시대가 변한 지금 인기 있는 야외결혼식장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1919년 6월 경성부가 장충단을 장충단‘공원’으로 바꾸기 위해 삽을 들었다. 벗나무와 인공연못 등을 이식해나갔다. 일종의 박람회였던 조선물산공진회(1915)를 연다고 경복궁을 부순 재료로 인근 남산장 요정을 짓던 때였다. 추모 공간 일대를 도시공원으로 만들면서 1932년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기린 콘크리트 건물 ‘박문사’(현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와 상하이사변으로 전사한 일본군 동상을 세웠다.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았다.

이준 열사 동상

눈 밝은 이라면 하나같이 발걸음을 멈추는 지점도 있다. ‘동상들’ 앞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장충단공원엔 1964년엔 이준 열사 동상, 1968년 사명대사 동상, 1970년 유관순 열사 동상이 나란히 들어섰다. 그런데 이들의 이목구비가 모조리 서양인 같을뿐더러 실재 인물들과 안 닮았다는 것이 도리어 ‘볼거리’로 입에 오르내린다.

“1960년대 활동한 국내 조각가들이 각자 생각한 이상적인 위인의 얼굴을 서구 동상에서 따왔어요. 박정희 정권 아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등을 주축으로 동상이 집중 건립되며 효창공원 등 같은 시기 세운 동상들도 인상이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라도 원래 얼굴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어요.”

동상 앞에서 참가자들에게 한 김 교수의 말이다.


왜 지금 ‘근대공원 답사’가 필요할까

공원을 걷는 건 ‘도시의 허파’를 걷는 일과 곧잘 비유된다. 국내외 대도시를 여행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에 남는 공원 체험을 갖기 마련이다. 미국 뉴욕엔 하이라인이나 센트럴파크가, 영국 런던엔 하이드파크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선 구엘공원이 시민들 폐를 정화하고 자부심을 만든다. 이처럼 잘 만든 공원은 도시인의 인간다움을 회복시키고 도시 위상을 높여준다.

새삼 한국의 ‘근대공원’을 집중해 걸어봐야 할 이유다. 하지만 왜 ‘근대’일까. 근대를 규정하는 담론이 여전히 분분한 상황에서, 한국의 근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와 궤를 같이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우리 공원 역사를 무조건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으로 보는 건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공원 탄생의 과정으로 당대 사회적 스펙트럼을 돌아보고, 사라진 흔적마저 발굴해 ‘기억의 층위’를 구체적으로 엮어나가는 일이 필요한 때”라고 설명한다.

공원을 걸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공원 조성의 역사 그 자체가 한국 도시사로 읽히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1888년 인천에 조성된 최초 도시공원인 ‘각국공원’ 이후로 한국 공원 역사도 130여 년을 품었다. 조선 왕실이 만든 파고다공원(탑골공원)부터 장충단공원과 사직단공원, 효창원공원, 훈련원공원, ‘창경원’ 등등…. 우리나라 공원은 초기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거닐던 곳에서, 현재 도시인의 휴식 공간이 되는 과정까지 도시의 변화를 몸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이다.

“2020년 7월부터 시행되는 ‘도시공원 일몰제’를 앞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1인당 도시공원 조성 면적은 국민 삶의 질 지표로 제시됩니다. 그동안 공원을 무심하게 봐왔지만, 도시공원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더 진지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답사를 마치면서 한 김 교수의 말이 장충단공원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