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호국의 달, 임정의 독립정신 만나는 곳

용산구 효창공원

등록 : 2020-06-11 15:44
용산구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 등 7위 선열 위패를 모신 의열사 모습. 용산구 제공

용산구 효창동에는 효창공원(효창원로 177-18)이 있다. 면적이 12만3307㎡에 이른다. 효창동 전체 면적(0.43㎢)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170여 종 울창한 수림과 놀이터, 농구장, 배드민턴장 등 편의시설이 주민 휴식공간 구실을 한다.

하지만 효창공원은 일반적인 공원이 아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지금으로부터 234년 전,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가 이곳에 묻혔다. 그때도 지금처럼 전염병이 창궐했고 세자는 홍역으로 목숨을 잃었다.

임금이 고른 묏자리는 천혜의 길지였다. 뒤로는 깊은 숲, 앞으로는 너른 한강이 자리했다. 무덤에 효창묘라 이름 붙였다. 효가 이뤄진다는 뜻이다. 5살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을 생각했던 임금의 절절한 부정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이곳을 아기능이라 불렀다.

그 뒤로 문효세자의 생모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 등이 이곳에 함께 묻혔다. 1870년 고종이 효창묘를 효창원으로 승격시킨 이유다. 지금의 청파동1가에서부터 공덕오거리 인근까지 약 100만 평에 달했던 거대한 숲이 묘역을 아늑하게 감쌌다.

불행은 근대사와 함께 왔다.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중국, 일본 사이에 벌어진 청일전쟁(1894년) 당시 서울 도성 밖에 진주했던 오시마 요시마사(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고조부) 혼성 제9여단 병력 7천 명이 효창원 인근 만리창에 숙영지를 만들었다.

아울러 일제는 러일전쟁(1904년) 이후 용산 전역을 군용지로 수용해 지금의 미군기지와 용산역을 중심으로 100만 평의 군사철도기지를 조성했다. 1924년에는 인근 효창원 일부(8만1460평)를 공원용지로 책정했다.

효창원이 정식 공원이 된 건 1940년이다. 당시 면적이 31만7천㎡였으니 지금보다 3배 더 넓었다. 왕실 묘역은 1945년 봄 서오릉 일대로 모두 옮겨졌다.


공원이 다시 사람들 주목을 받은 건 해방 이후다. 1946년 7월 백범 김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 의사 유해를 효창공원에 모셨다. 2년 뒤 9월엔 임정요인(이동녕 주석, 조성환 군무부장, 차리석 비서장)들이, 다음해 7월엔 김구 선생이 이곳에 묻혔다.

공원을 찾는 이라면 꼭 둘러봐야 할 곳이 있다. 7위 선열 무덤이다. 정문 인근 임정요인 묘역부터 삼 의사 묘역, 백범 김구 묘역까지 모두 참배하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공원에는 두 분이 더 묻혀 있다. 김구 선생 묘역에는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가, 임정요인 묘역에는 차리석 비서장의 부인 강리성 여사가 합장됐다. 이들 역시 남편과 임정 식구들을 뒷바라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다. 잊을 수 없다.

모셔와야 할 분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다.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고 했던 의사의 유언대로, 하루빨리 그의 유해를 찾아 효창공원 가묘에 모셔야 한다. 후손 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효창공원에서 ‘국가안위 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귀)한 선조들을 기리는 나들이를 하는 건 어떨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뜻깊은 역사 교육이 될 것이다.

김재훈 용산구 언론팀 주무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