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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5분 남았어요!” 방문 밖 아이 소리에 강제 칼퇴 당해

코로나발 발견 ② 일터

등록 : 2020-05-21 14:47
‘난생처음 재택근무’에 당혹·기대 동시에

“불필요한 회의 없어 효율성 크게 올라” “고립 고독감 고충 커”

“지금 당신의 일터를 찍어 보내주세요.” 코로나19 사태로 ‘생애 첫 재택근무’를 해봤다는 국내외 시민들에게 ‘일터’ 기록 사진을 요청했다. 교육, 통신, 경영, 언론, 예술 분야 등 다양한 직무에 몸담은 시민들이 ‘집에서 일한 경험’을 공유했다.

“다섯 살, 일곱 살 두 아이에게 말했어요. 이 방은 이제부터 ‘아빠 회사’라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진 출입 금지라고. 한창 업무를 보는데 베란다에서 아이들이 내내 손을 흔들더군요. 오후 5시55분. 방문에서 쿵쿵 소리가 났습니다. ‘아빠! 5분 남았어요!’ 강제 칼퇴였죠.(웃음)”

비영리국제단체(NGO) 모금팀에서 일하는 주재훈(40)씨는 3월부터 두 달 동안 선택적 재택근무를 했다. “재택근무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효율이 좋았습니다. 노트북이 있으니 회의·결재·보고가 집에서 다 가능했어요. 출퇴근 시간 2시간 감축, 경비 절감만 봐도 큰 장점이었고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생애 첫 재택근무’를 맛본 이들이 늘었다. 보편적 근무형태인 이른바 ‘나인 투 식스’ 일상에 변화가 깃들며, 집 안으로 ‘사무실’이 들어섰다. 태곳적부터 ‘쉼터’로 여긴 성스러운 공간에 전쟁터로 비유해온 ‘일터’가 섞였다. 경계 파괴일까 공간 융합일까. 혼란 속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가지각색 풍경을 만들고 있다. 서울시민들의 ‘생애 첫 재택근무’ 소감을 경청했다.



생애 첫 재택근무 “대체로 만족했다”

1997년 3월 한국 사회에 재택근무제가 도입됐다. 과로 사회를 방지하고 탄력 있는 근무제를 실행하기 위함이었지만 깊숙이 자리 잡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코로나19 감염 공포’가 재택근무 도입을 성큼 앞당겼다. 11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 1월1일부터 5월6일까지 중소중견기업에서 재택근무제를 신청한 근로자가 1만8653명에 달했다. 2019년(317명)과 비교해 60배가량 늘었다.

각종 사무기구가 집 안에 펼쳐졌다. 아이티(IT)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김아무개(42)씨는 “3월 말부터 두 달째 완전 재택근무 중임에도 본사가 있는 일본과 불편 없이 소통 중”이라며 “눈 뜨면 컴퓨터가 눈앞에 있고, 불필요한 회의나 급작스러운 업무지시가 없으니 효율성이 크게 올랐다”고 만족했다. 신문사 아이티 개발 부서에 있는 노연준씨는 “90년대·2000년대와 달리 아이티 인프라가 원격근무지에서도 얼마든 작업이 가능한 환경이 됐기 때문이다. 재택에선 흐름이 끊기지 않고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효율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기업 마케팅 부서에 있는 김아무개(36)씨는 3월부터 매주 금요일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본인은 방에서, 아내는 거실 식탁에서 업무를 처리한다. 김씨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나가기 전까진 힘들었으나, 어린이집이 개원한 지금은 훨씬 편안하다. 보통 주중엔 대면이 필요한 일을, 금요일에 비대면이 가능한 일을 몰아서 빠르게 처리하는데 효율성이 높다”고 말했다.

소규모 집단감염 우려로 ‘회식 자제령’이 떨어진 뒤 대학 강사 박아무개(45)씨는 “코로나19란 ‘사회적 명분’이 생긴 덕에 불필요한 회식이 대폭 줄었던 것도 인상적인 경험”이라고 말했다. “평소 내향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이번 사태가 오히려 속 편하다고 볼 것이다. 코로나19로 비로소 ‘저녁 있는 삶’이 시작돼 자기개발이나 휴식에 투자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단 것이다.


“기술적응·고립감” “노사 인식 차이” 고충

한편, 준비 없이 닥친 초유 사태에 “갈등을 목격했다”는 사례는 교육현장에서 많았다. 고등학교 교사 박아무개(36)씨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등교 시작 뒤 “수업에 자부심 높고 교육현장에서 덕망을 쌓아온 분들이 온라인 대면과 기기 적응을 못하는 회의감으로 힘들어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분노와 절망이 오갔다”고 털어놨다. “이비에스(EBS) 온라인 클래스 같은 원격교육 시스템, 네이버 밴드, 네이버 폼, 구글 설문지 등 각자가 생애 처음 만난 시스템들과 하나씩 부딪히면서 대처하고 있다. 온라인 등교 시범학교가 아닌 경우는 장비를 지원받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학교란 장소는 아이들이 관계를 쌓고 부대끼며 자라는 곳인데, 이번 사태가 선생님들 사이에 많은 질문과 숙제를 남겼다”고 전했다.

학원 강사 김민수씨(35)는 “줌 화면으로 학생들 집안 사정까지 공유된 순간이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스피커 저편으로 평소 부모님들 대화 내용과 방식, 말투가 다 들렸다. 마치 ‘가정방문’ 하는 기분이었다. ‘디지털 차별’ 현장도 빈번했다. 인터넷 사정이 여의치 않아 튕겨나가는 애들로 수업이 불안정했다”고 털어놨다.


벽에 업무 메모 부착하는 등 ‘집 속 일터’ 조성 노력 필요

높아진 IT 기술, 불편 없이 재택 구현

휴식 경계 모호…‘쉼의 유혹’ 극복 과제

익숙한 동선 이탈 ‘집 탐구’ 시도할만

휴식과 일의 경계가 모호한 집에서 ‘쉼의 유혹’을 이기기 어려웠던 경험도 줄을 이었다. 프리랜서 에디터 안대근(30)씨 말이다. “공공도서관을 일터 삼아왔는데 코로나19로 모두 휴관했고, 자주 가던 카페도 단축근무를 해 결국 집에 머물렀다. 보통 프리랜서들을 독립 창작자로 보지만, 실상은 끊임없는 프로젝트 그룹 결성과 조직과의 미팅 등 대면 접촉으로 사회적 소속감과 결과물 완성도를 유지해간다. 주변 사람과 새로운 생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공기업에 소속돼 콘텐츠를 기획하는 김란영(26)씨도 ‘고립에서 온 고독감’이 고충이라 꼽았다. 코로나19 확진자 동선과 가까운 사무실이 일시적 폐쇄에 들어갔는데 “온갖 툴과 장비를 사용해도 온라인 소통에선 늘 부족함을 느꼈다. 1인 가구로서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땐 ‘폐인’이 되더라. 대화할 사람이 그리워 이 인터뷰도 반가울 지경”이라며 “취업시장이 얼어붙은 지금 일터가 있다는 것만해도 감사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하나 싶어 우울하다”고 토로했다.

‘사내 눈치 보기’로 재택근무가 어려웠던 사례를 꼽는 경우도 빈번했다. 중소기업 해외영업팀에서 일하는 박아무개(37)씨는 지난 3월 만삭인 몸에 코로나19 감염 불안으로 주 2회 재택근무를 신청했음에도 “대표님 눈치”를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알고보니 회사 전체에서 유일한 재택근무 신청자였다. 근태에 대한 노사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박씨가 강조했다.


재택근무 “익숙한 동선부터 바꿔보자”

창작자이자 대학 강사로 일하는 박아무개씨는 “쿼런틴(전염병 예방을 위한 자가격리) 속 일터의 오늘 날”이라며 집 안에서 일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옮긴 과정을 40여 장 사진과 영상으로 찍어 보내오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촉발한 ‘노동환경 변화’가 논제에 오른 후 일과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공간 조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장소 구애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일컫는 ‘리모트 워크’, ‘직장 없는 시대’를 분석한 단행본들도 등장했다.

‘일하기 좋은 환경’을 연구하고 디자인하는 건축가 김란(스튜디오 105-10 대표)씨는 ‘우선 재택근무 환경만의 개인화 장점에 집중해보라’고 조언했다. 생산성, 창의성, 몰입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최근 ‘집 같은 사무실’(Home-like Office)을 만드는 일이 오피스 디자인의 주요 트렌드인데, 당분간 ‘새로운 일의 방식’을 경험하고 누려보자는 것이다.

재택근무의 강점을 높이면서 일터와 쉼터로서 공간 구분이 필요하다면 방문에 문패(표지판) 달기 벽에 업무 관련 포스터와 메모 부착 공기정화식물 들이기 필요하다면 방음·차음 공사 등을 시도해볼 수 있다. 동거인이 있다면 “방에 들어가면 출근입니다. 방해하지 말아줘요”라며 경계를 그어둔다.

가능하다면 ‘좋은 의자’도 필요하다. 식탁 의자 혹은 스툴(등판과 팔걸이 없는 의자)에서 일하면 자세가 쉽게 나빠지기 때문이다. 책상엔 모니터암을 설치하고, 조도와 색상이 바뀌는 조명으로 공간 분위기를 바꿔주는 방법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몸에 익숙했던 동선을 벗어나는 시도가 필요하다. 탐험하듯 집의 가능성을 탐구할 때다. 김씨가 전했다. “음식을 먹거나 넷플릭스를 보던 테이블에서 갑자기 일을 하는 건 너무 어렵죠. 현실에선 테이블 하나에서 밥도 먹고 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땐 ‘일하는 의자’와 ‘밥 먹는 의자’를 따로 두고, 식사와 업무를 각각 방향을 바꿔 구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작은 생활의 지혜가 집 속 일터를 편안하게 만듭니다.”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