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현대까지, 켜켜이 시간을 쌓아온 동네

주택가에서 카페·문화거리로 새롭게 변해가는 명륜동 일대

등록 : 2020-02-20 14:22 수정 : 2020-02-28 14:21
600년 인륜 밝혀온 성균관 주변으로

어느 골목에나 젊은 청춘들 가득 넘쳐

드라마 촬영 장소로 알려진 창화당 등

식당·공방 등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화가의 가슴속에 만 가지 봄기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준다.” 혜원 신윤복이 조선 후기에 그린 <미인도>에 붙인 글귀다. 때늦은 한파로 꽁꽁 얼어붙었던 서울에도 다시 봄기운이 찾아왔다. 골목마다 색이 넘실댄다. 옛 청춘들과 오늘날 청춘들 초상이 그림처럼 차오르는 이곳, 바로 종로구 명륜동이다.

명륜동 안쪽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서니 근대한옥을 개조한 식당과 카페들이 어느새 즐비하게 늘어섰다.


봄날, 명륜동 골목이 전한 소식들

혜화동 로터리에서 북쪽. 뒤로는 북악산을, 중심에 성균관대학교를 품은 명륜동은 서울 도심에 있음에도 사계절 고즈넉한 동네다. 길 건너 지척인 동숭동과 대학로 일대가 매일 분주함 속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반면, 명륜동은 낮밤 유유하다. 아마 고고한 동네 이름 덕인지 모른다.

옛 성균관 터에 남아 있는 명륜당

명륜동에서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부속 기관인 ‘명륜당’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졌다. 성균관대 정문 부근에 옛 성균관 터가 온전하게 보존돼 있음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공자와 그 제자들 위패를 모신 문묘(대성전과 일대)를 중심으로 유생들을 위한 강학과 시험 장소로 쓰인 명륜당, 도서관, 유생들 전용 식당이자 출석 횟수를 점검한 진사식당, 200여 명의 유생이 기숙한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자리했다.

부지런한 성균관 유생들이 새벽부터 깨어 자습하고 마당을 오가며 글을 외던 시절, 그 모든 이야기를 목격한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9호)도 앞마당에 우람한 자태로 서 있다. 성균관 정문이던 ‘신삼문’은 보통 걸쇠를 걸어두기 때문에 성균관대 입구에서 탕평비각 뒤쪽 주차장 방향의 협문을 통하면 들어서기 쉽다.

다방, 식당, 책방…골목마다 청춘들

문묘 일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든 그 끝엔 오늘날 청춘들이 고여 있음이 재밌다. 근대 한옥을 개조한 식당과 카페, 공방 등이 속속 자리 잡는 모양새다. 사라질 법한 오래된 가게는 청년들이 이어받고, 옛 한옥 지붕과 주택들이 어우러져 새 지형을 만든다. ‘명륜’에 따른 유서 깊은 학구열도 오늘날 책방에서 재현되는 기분이다.

1956년에 문을 열어 명륜동과 함께 세월을 보낸 ‘학림’다방은 골목 안쪽에 분점이 생겼다. 학림 로스터리에선 원두를 전문으로 판매한다.

1956년 큰길가에 문을 연 ‘학림’(學林)다방이 단골들 사랑을 받아 착실히 나이 먹는 동안, 뒤편 골목으로 ‘학림’ 두 번째 카페가 문을 열었다. 아우 격인 두 번째 학림다방은 보다 현대적이다. 신식 로스팅 기계를 갖추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원두를 전문으로 판매한다.

만두 가게 창화당. 드라마 촬영 장소로, 장만월(아이유)과 구찬성(여진구)이 앉았던 테이블1 이 인기다.

맞은편에 있는 만두 가게 ‘창화당’은 복고 감성을 살린 인테리어로 입소문을 탔다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호텔 델루나> 촬영 장소로 쓰여 돌연 유명해졌다. 드라마 속에서 아이유와 여진구가 앉았던 자리를 알리는 푯말도 생겼다. 점심시간엔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들어갈 수 있다.

30년 가까이 성대 앞을 지켜온 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은 지난해 여름 경영 악화로 폐업 위기에 처했다가 전범선씨 등 이삼십대 청년 주인들이 인수해 되살아났다. 공간 개조 뒤 민족, 여성, 동물해방, 환경보호, 성소수자 등 책장별로 장서를 구분해 진열했다. 다채로운 담론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나가겠다는 꿈이다.

대로변으로 다시 걸어 나가 혜화동 로터리로 가면 1953년 문을 연 ‘동양서림’이 있다. 세월 따라 녹슨 간판이 오히려 가게 자부심이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넓은 내부 공간을 시원하게 개조해 지나가던 이 누구나 들어가 책 읽기 쉽도록 만들었다. 2층엔 신촌에서 이사 온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이 움터 활발히 운영 중이다. 소설가와 시인, 비평가와 번역가들이 번갈아 낭독회를 연다.

근대 건축 유적, 볼거리 등 숨어 있어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고석공간

골목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을 훑는 맛도 명륜동 산책의 묘미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1983년 매형인 박고석 화백과 의상디자이너였던 누나 김순자를 위해 설계한 ‘고석공간’(창경궁로26길 25)이 때때로 방문객을 맞고 있으며, 서울과학고등학교 위쪽 주택가엔 조선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좌장 우암 송시열의 집터가 남아 벽면 바위에 그가 쓴 ‘증주벽립’(曾朱壁立·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것처럼 내가 학습해야 한다는 뜻)이란 글자를 볼 수 있다.

명륜동 와룡문화센터 5층엔 국내 최초 어린이청소년 국학도서관이 문을 연 지 두 해를 맞았다. ‘국학’에 특화한 공간으로 일반도서 2100여 권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국학진흥원 등의 정기간행물을 만나볼 수 있다.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