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운동장 달구던 뜨거운 그 함성을 추억하며

서울의 작은 박물관 ㉑ 중구 동대문운동장기념관

등록 : 2020-02-06 14:17
1925년 경성운동장 이름으로 문 열어

경평축구 대항전엔 1만5천 관중 꽉 차

2007년 철거 때까지 수많은 스타 배출

최동원과 차범근 멋진 경기 눈에 선해

1975년 어느 날 서울운동장 야구장 마운드 위에 선 투수가 있었다.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의 기록을 세우고 있던 경남고 2학년 최동원이 바로 그였다. 최동원은 1976년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20 탈삼진 완봉승을 거둔다. 프로야구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고교야구 전성시대를 함께했던 동대문운동장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됐다. 그리고 그곳에는 사람들의 추억에 간직된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경성운동장부터 동대문운동장까지


중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한쪽에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 들어가면 ‘동대문운동장’이라 쓰인 커다란 간판이 방문객을 반긴다. 동대문운동장에 마지막까지 붙어 있던 간판이다.

일제강점기 야구방망이와 야구공.

사람들 추억 속에 살아 있는 동대문운동장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이다. 동대문야구장에서 사용했던 집표통, 조명탑 라이트, 확성기, 관람석 의자, 머릿돌, 포수 마스크, 야구공, 해머, 사이렌,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야구방망이와 야구공, 축구공, 마라톤 운동화도 전시됐다. 한국 야구사에서 명장으로 평가받는 김일배 감독의 유품, 포수 장비와 야구화도 볼 수 있다.

조선운수, 제일은행, 연세대, 경동고, 장충고 등에서 선수들을 이끌며 명장으로 평가받는 김일배 감독의 유품.

동대문운동장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2007년 철거됐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 전시된 안내 글에 따르면 동대문운동장 자리는 조선시대에는 군사시설인 하도감과 염초청이 있던 곳이다. 일제는 1925년 운동장을 짓고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총면적 7만5천㎡, 총공사비 15만5천원, 수용인원 2만5900명 등의 규모였다.

1929년에는 최초의 종합대회인 전조선경기대회(현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서울과 평양의 축구단이 맞붙었던 경평축구대항전은 1만5천여 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기 한 해 전인 1935년에 참여했던 제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육상 1만m 종목에서 우승한 곳도 경성운동장이었다.

1945년에 광복을 맞아 경성운동장 이름을 서울운동장으로 바꾼다. 1945년 10월 경축전국종합경기대회가 열렸다. 운동장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조명탑 두 개가 이곳이 운동장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간 야구 경기가 열렸던 곳도 서울운동장 야구장이다. 1966년 10월7일 야구장에 조명탑을 설치했다. 축구장에는 1968년에 조명탑을 설치했다. 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한쪽에 조명탑 2개가 남아 있어 이곳이 운동장이었던 것을 알려준다.

서울운동장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뀐 1985년 프로야구단 오비(OB) 베어스의 홈구장으로 잠깐 사용되기도 했다.


동대문운동장의 주인공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 전시한 옛 경기장 축소모형.

전시실 한쪽에 유명 운동선수를 소개하는 전시물이 보인다.

1975년 어느 날 서울운동장 야구장 마운드에 선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4회 전국 우수고교 초청 경기대회에서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 기록을 세우던 경남고 2학년 최동원이다. 그리고 그는 1976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20 탈삼진 완봉승을 거둔다.

또 1976년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3 대 0으로 뒤지고 있던 경기를 종료 7분을 앞두고 3골을 넣어 무승부로 만들었던 차범근 선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사인볼이 있다.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육상 포환던지기 백옥자 선수가 1974년 서울운동장에서 세웠던 16m96㎝의 한국 신기록은 1996년까지 22년 동안 깨지지 않고 이어졌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그는 1931년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7회 조선신궁경기대회 5천m 2위, 1935년 제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 1만m 우승을 기록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참가한 13회의 마라톤 경기에서 10번 우승했다.

1930년대 복싱의 신으로 알려졌던 서정권 선수의 기록도 보인다. 그는 1930년 제5회 전일본선수권대회 플라이급 우승을 시작으로 3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32년 한국 선수 최초로 미국에 진출해 더블유비시(WBC) 밴텀급 세계 6위까지 올랐다. 1935년 서정권 선수의 귀국 환영 시합이 경성운동장 특설 링에서 열렸다.

고교야구 4대 대회인 청룡기,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대기 등이 열렸던 곳도 이곳이었다. 동대문야구장은 고교야구의 열기로 가득했다. 동대문야구장의 마지막 경기는 2007년 추계 서울특별시 고교야구대회 결승전 배명고와 충암고의 경기였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고향의 고교야구팀 경기를 응원하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운동장을 누볐던 선수들과 그들을 응원했던 많은 사람이 동대문운동장의 주인공이었다.


이간수문과 옛 집터 등을 볼 수 있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이간수문.

동대문운동장기념관 건물 주변에 있는,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성곽에 설치된 수문 중 하나였던 이간수문을 보러 간다. 2개의 홍예문으로 된 이간수문의 규모에 놀란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운동장을 만들면서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이간수문 주변을 돌아보고 나서 동대문운동장기념관 건물 옆 빈터에 있는 유물들 앞에 선다. 옛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터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중기의 건물 유적지다. 한양도성 성곽 일부와 조선시대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10여 곳의 건물터와 집수시설, 우물 등이 발견됐다. 이 중 건물터 6곳과 집수시설 2곳, 우물 세 개를 이전 복원했다.

집수시설은 작은 연못 같다. 둘레를 돌로 쌓았다.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이전 복원했다고 한다. 여름이면 이곳에 피어난 연꽃을 보러 오는 사람이 꽤 있다.

옛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터에서 발굴된 유물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사이 것이다. 건물터와 집수시설, 배수시설 등과 함께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보이는 유적 등도 확인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훈련원공원 조경시설의 일부였던 기와보도와 연못 등도 조사됐다고 한다.

옛 야구장 터에서 확인된 우물은 깊이가 170㎝다. 출토 상황 그대로 이전했으며 일부 석재를 보충해서 복원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집으로 가는 길 공원 한쪽에 성화대가 눈에 띄었다. 동대문운동장에 성화대가 설치된 때는 1968년이다. 그때부터 동대문운동장의 마지막 성화를 밝힐 때까지 운동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모든 사람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