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날 선바위에서 “코로나 사태 진정” 빌어나볼까

내일로 다가온 정월대보름에 찾아가 소원 빌기 좋은 서울 시내 소소한 여행지

등록 : 2020-02-06 14:09
선바위, 기이한 모습에 소원바위 호칭

옥천암 마애보살, 태조가 소원을 빈 곳

환구단, ‘대한제국은 독립국’ 상징 장소

한옥마을 타임캡슐, 시민들 소망 담겨

예전에는 정월대보름이면 조용한 시골 마을이 축제처럼 들썩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곳곳에서 준비하던 정월대보름 축제가 취소됐으니, 축제 대신 소소한 여행지를 찾아보면 어떨까? 소원을 빌던 정월대보름 풍습을 떠올리며 옛사람들의 기원이 남아 있는 서울의 여행지 몇 곳을 소개한다.


선바위~한양도성~등과정 터~사직단으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걷다보면 선바위와 국사당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를 따라가다보면 가파른 오르막길에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을 지나 멋진 벽화가 그려진 골목 계단으로 올라가면 종각이 있다.

인왕산 골짜기에 들어선 인왕사는 조선시대 태조 임금이 조생 스님을 만났던 곳이다.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였지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임금 때부터 한양도성 바로 옆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법회를 열었던 곳이다. 창건주는 무학대사와 조생선사다. 세종 임금 때에는 조선 왕조를 지키려는 뜻에서 절이 있는 산 이름을 인왕산이라고 했다.

신라시대 도선국사는 현재 인왕사 위에 있는 선바위를 두고 왕기가 서리는 길지라고 했다고 전한다. 선바위는 1억5천만 년 전에 생성됐다고 추정하는 바위인데, 그 생김새가 기이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소원을 빌어왔다. 이른바 ‘소원바위, 선바위’라고 부른다.

선바위. 멀리 한양도성 성곽이 보인다.

국사당은 조선시대 남산을 신격화해서 목멱대왕이라고 하고 제를 지냈던 곳이다. 벼슬이 아무리 높아도 이곳에서 제를 올릴 수 없었다. 나중에 굿당으로 변했다. 원래는 현재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일본 신궁을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됐다. 국사당 위에 선바위가 있다. 국사당은 중요민속자료 제28호, 선바위는 서울시 민속자료 제4호다.

선바위 위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야가 트이는 곳이 나온다. 너럭바위 위에 커다란 바위가 놓인 곳이다. 그곳을 지나 인왕산 정상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르다보면 한양도성 성곽을 만나게 된다. 성곽을 오른쪽에 두고 산을 내려와서 도로를 만나면 좌회전한 뒤 인왕산 호랑이상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걷다보면 조선시대 무사들이 궁술을 연마하던 등과정 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표석을 지나 내려가면 나라에서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를 올리던 제단인 사직단이 나온다. 이곳에서 짧은 산책을 마친다.


조선의 시작과 끝, 그 간절한 기원의 장소

홍제천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기도를 올린 곳이 홍제천 옆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었다. 이 부처상은 예로부터 민간에서 ‘불암’ ‘보도각 백불’ 등으로 불리면서 많은 사람이 소원을 빌던 곳이다.

조선의 문을 열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많은 이견과 불신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민간에 널리 알려진 기도처를 찾아 왕이 직접 기도를 올린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조선은 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조선 말, 외세에 의해 나라가 짓밟히고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을 때 흥선대원군의 부인은 아들 고종을 위해 이 불상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하니, 이 불상은 조선의 시작과 끝에 왕실의 간절한 기원이 담긴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상은 고려시대 것으로, 보물 제1820호다.

조선시대 임금 중 불교에 마음을 쏟은 이가 세조다. 세조는 1465년(세조 11년)에 흥복사 터를 넓혀 원각사를 지었다. 세조가 원각사를 지은 이유는 부처의 사리가 나타나는 현상을 겪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날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베푸니, 여래가 현상(現相)하고 감로(甘露)가 내렸다. 황가사의 중 3인이 탑을 둘러싸고 정근 하는데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또 빛이 대낮과 같이 환하였고 채색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찼다. 사리분신(부처의 사리가 나타나는 현상)이 수백 개였는데, 곧 그 사리를 함원전에 공양하였고, 또 분신이 수십 매였다. 이와 같이 기이한 상서는 실로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므로, 다시 흥복사를 세워서 원각사로 삼고자 한다.’

원각사지십층석탑.

현재 탑골공원 안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원각사를 지은 지 2년 뒤인 1467년에 세운 것이다. 높이 12m의 이 탑에는 용과 연꽃무늬,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 오는 과정, 부처의 전생 설화 등을 새겼다. 현판과 기둥 지붕 등이 탑 전체에 보이는데, 하나의 완성된 건물 같다. 탑의 재료는 대리석이다. 국보 제2호다.

탑골공원 한쪽에 대원각사비도 보인다.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으로 1471년(성종 2년)에 세웠다. 보물 제3호다.


대한제국을 하늘에 알린 환구단, 그리고 타임캡슐

1897년 10월 고종은 환구단에 나가 하늘에 제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동시에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환구단이 들어선 곳은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자리였다.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따라 환구단을 설치했다. 고종 황제가 머물렀던 황궁인 덕수궁과 마주보는 자리에 환구단을 지었다.

환구단 황궁우.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 원형 제단, 하늘 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 황궁우, 돌로 만든 북과 문 등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환구단을 철거하고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황궁우와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이 남아 옛 환구단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환구단은 조선으로부터 이어진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런 기원이 담긴 제의의 장소였다.

남산골한옥마을 타임캡슐.

환구단에서 직선거리 1.5㎞ 떨어진 곳에 천년 타임캡슐이 있다. 국내외 여행객들과 산책을 즐기는 직장인 등 많은 사람이 찾는 남산골한옥마을 시설물 중 꼭대기에 자리 잡은 타임캡슐은 외진 곳에 있어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다.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에 타임캡슐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한양에 수도를 세우면서 시작된 서울의 역사 천년을 맞이하는 2394년에 개봉하는 이른바 ‘천년 타임캡슐’이다.

이곳에는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했던 때 서울 모습을 대표하는 문물 600점을 캡슐에 담아 묻었다. 타임캡슐 광장에 있는 대형 중앙판석 지하 15m 지점에 캡슐을 묻었다. 캡슐은 보신각종을 본뜬 모양으로, 그 안에는 도시와 인간을 대표하는 600점의 문물과 시민 공모로 제안된 품목 1만2676점이 담겼다.

2394년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시대의 희망은 무엇일까? 그 기원의 의미를 헤아리며 인적 드문 타임캡슐 광장에 잠시 머문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