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찜통더위 속 ‘만삭 녹음’이 대박 났다

데뷔 60년 맞아 전국 투어 시작한 이미자

등록 : 2019-05-23 16:14
1964년 여름, 스카라 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서

만삭의 이미자, ‘동백아가씨’ 녹음

임신 중 현미도 같이 녹음, 대박 나

단독 공연에서 열창하는 이미자 1970년대.

데뷔 60주년을 맞은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한국 대중가요사의 산증인인 그는 1990년에 통산 560장의 음반과 총 2069곡을 발표한 다작 가수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973년 방한한 베트남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5년 동안 파월 장병 위문 공연의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최고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국내 가수 최초로 외국의 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국내외에서 세 번이나 훈장을 받은 유일한 가수다.

상복도 많았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MBC 10대 가수상의 단골 수상자였고, 그중 세 번이나 가수왕에 등극했다. 당시 여자 가수 지망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미자의 창법을 모델로 삼았다. 2002년 국내 가수 처음으로 남북에 동시 생중계된 그의 ‘평양 특별공연’은 한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치는 화려한 경력보다는 서민의 애환과 정서를 어루만지며 대중과 소통한 가수라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필자가 이미자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30주년 공연 이후 신보를 준비 중이던 환상의 음악 콤비 이미자-박춘석 두 사람을 함께 취재하는 자리였다. 당시는 트로트에 관심 없는 20대 청춘이었기에 46살의 중년 가수와 첫 만남에 큰 감흥은 없었다.


데뷔 30주년 공연 이후 신보 발표를 앞두고 연습 중인 이미자(1990년)와 데뷔 55주년 때 사인 받은 앨범(2014년).

하지만 사진 촬영을 하면서 소름 돋는 경험을 했다. 박춘석의 정갈한 피아노 연주에 맞춰 맑고 청아한 음색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에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진정성이 강력했다. 왜 부모님 세대가 그의 노래에 열광하는지, 왜 그의 성대는 사후에 보존해야 하는 국보급으로 평가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세월이 훌쩍 지난 2004년. 데뷔 45주년 기념공연 팸플릿에 들어갈 이미자의 음악 인생을 정리하는 글을 써주면서 선생과 재회했다. 최연소 관객이 돼 그의 공연을 처음 보았다. 그의 노래는 마치 ‘순박한 시골 누이’ 같았다. 가식이나 기교를 찾을 수 없었다.

2014년 55주년 기념공연 때는 한 언론사의 요청으로 이미자의 데뷔 초기 음반들을 빌려준 적이 있다. 음반 대여 조건으로 경제적 대가는 필요 없고 그가 좋아하는 음반에 직접 사인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어떤 음반에 사인을 할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총 4장의 음반에 사인을 해주었는데 대표곡 ‘동백아가씨’ 음반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자는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여고 졸업을 앞둔 1958년. 그는 민영 TV 대한방송(HLKZ)의 <예능 로터리>에서 최고상을 받아 유니버샬레코드에서 ‘행여나 오시려나’ 등의 유성기 음반을 녹음하며 정식 가수로 데뷔했다.

초창기 그의 가수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싸구려 출연료에 지방 무대를 돌아다니며 선배들 양말을 빨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친 적도 있었다. 이미자는 1964년 초까지 스카라극장 인근의 다방들을 드나들며 일거리를 찾았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 주제가를 녹음하는 행운이 찾아왔다. 사실 ‘동백아가씨’를 녹음하기로 내정된 가수는 최숙자였다. 하지만 신생 음반사인 지구레코드는 인기 가수의 높은 출연료가 부담스러워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을 받아 저렴한 비용으로 이미자를 대타로 선택했다.

1964년 여름, 스카라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 낡은 선풍기 한 대로 찜통더위를 이겨내며 만삭의 이미자와 현미가 함께 녹음을 끝냈다. 이미자는 ‘동백 아가씨’, 현미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녹음했다. 동반 히트가 터졌다. 이에 ‘만삭에 녹음을 하면 대박이 난다’는 소문이 가요계에 퍼지면서 한동안 임신 녹음이 유행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1964년 최대 히트곡 ‘동백 아가씨’는 갖가지 사연을 연출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은 인지도가 빈약한 신생 음반사인 지구보다는 한 지붕 회사였던 미도파레코드 이름으로 음반을 슬쩍 발매했다고 한다.

처음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음반이 대박을 터뜨리자 미도파 측에서 회사 이름 도용을 문제 삼으며 소송을 걸었다. ‘동백아가씨’ 음반이 미도파와 지구 두 버전이 있는 이유다. 미도파가 초반이고 지구는 재발매 음반이다.

그런데 발매 당시 ‘동백아가씨’는 음반의 타이틀곡은 고사하고, 뒷면에 수록되는 푸대접을 받았다. 음반이 발매되자 그가 노래한 주제가의 인기가 영화를 능가하는 반전이 일어났다. 전국의 음반업자들이 판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쳤다. 생전에 작곡가 백영호는 “술집에서 술값 대신 ‘동백아가씨’ 음반을 제발 한 장만 구해달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35주 동안 인기 차트 1위를 차지했던 열풍은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트로트를 천시했던 젊은 대학생들이 ‘동백아가씨’를 합창하는 진풍경까지 연출했다.

첫 월남 공연 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이미자(1965년)와 제6회 방송가요대상 남녀 최우수가수상을 받은 이미자와 최희준(1970년).

1965년 거침없는 질주에 제동이 걸렸다. 경쟁사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동백아가씨’는 가요심의전문위원회에 의해 ‘왜색’을 띤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가 되었다. 금지곡 ‘동백아가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던 ‘동백아가씨’는 1987년 금지의 족쇄에서 풀려났다. 국내를 평정했던 ‘동백아가씨’ 열풍은 1966년 현해탄의 높은 파고를 넘었다. 이에 ‘이미자가 일본말로 노래를 녹음했다’는 소문은 한-일 수교로 생긴 반일 감정이 퍼지는 데 기름을 부었다. 노래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면서 조악하게 인쇄된 등사지가 붙어 있는 ‘일본어 동백아가씨’의 ‘빽판’까지 등장했다. 최근 빽판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을 집필하면서 발견한 7인치 도넛 빽판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새롭게 발견한 이미자 <동백아가씨>일본어 버전 7인치와 다양한 버전의 LP들.

이미자의 노래가 반세기 넘도록 남북을 초월해 사랑받은 이유는 타고난 실력에다 꾸준한 연습, 진지한 음악적 태도와 건실한 생활까지 합체되었기 때문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인 그는 “공연하는 데 한계가 온 것 같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잘 안 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보여드리고 들려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념공연마다 음반을 선보였던 이미자는 이번에도 신곡이 포함된 기념 앨범 ‘노래 인생 60년 나의 노래 60곡’을 발표했다. 부디 이번이 그의 마지막 공연, 마지막 음반이 아니길 바란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