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60년대 절창 차중락·배호의 너무 이른 죽음

11월 낙엽 따라 가버린 가수들 下

등록 : 2018-11-29 15:09 수정 : 2019-02-14 14:13
친구이자 라이벌 차중락·배호

68년 27살, 71년 29살 때 요절

차중락 ‘낙엽 따라…’ 운명 밟아

배호도 데뷔곡 ‘굿바이’처럼

생전에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차중락(좌)과 배호(우) 1968년.

11월에 별이 되어 떠난 중요 가수들이 의외로 많음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11월 괴담’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3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가수는 유재하와 김현식, 김정호와 최병걸 이전에도 60년대를 풍미했던 차중락과 배호가 있다. 차중락과 배호는 생전에 서로를 아꼈던 친구라는 점에서는 유재하와 김현식과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올해에 50주기를 맞은 차중락은 1968년 11월10일에 27살의 나이로, 배호는 1971월 11월7일에 29살의 꽃다운 20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충격파를 날렸다.

밴드 ‘키보이스’의 리드보컬 출신인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된 건장한 체격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감미로운 바이브레이션 창법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철없는 아내’로 솔로로 독립한 그는 동양방송(TBC)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사랑의 종말’의 빅히트로 1967년 TBC 남자 최고신인가수상의 영예를 안고 음악 인생의 정점을 내달렸다. 인기 가수가 된 뒤 바쁜 활동과 잦은 스캔들로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차중락은 건강이 악화하기 시작했다. 1968년 11월10일. 서울 동일극장 무대에서 그는 고열로 쓰러지며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차중락은 사망 직전에 가을 시즌을 겨냥한 ‘낙엽의 눈물’ 등 5곡이 수록된 신보를 1968년 8월25일 발표했다. 이 노래들이 유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요절로 제작사인 유니버살레코드사는 급하게 유작 음반으로 포장해 재발매했다. 초반 타이틀 <차중락의 새노래>는 재반에서 <마지막 남기고 간 차중락의 새노래!>로 수정되었고, 타이틀곡도 ‘낙엽의 눈물’과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사망 직전 발매했던 차중락의 유작 초반(왼쪽)과 재반(오른쪽) (1968년 유니버살레코드).

짧은 솔로 가수 생활 동안 차중락이 남긴 곡은 20여 곡에 불과하다. 당대 대중의 선택은 ‘사랑의 종말’과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었지만, 그는 ‘마음은 울면서’와 ‘그대는 가고’ ‘철없는 아내’를 각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철없는 아내’는 70년대 후반 산이슬 출신의 박경애가 리메이크해 또다시 히트했다. 하지만 2004년 박경애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 노래를 녹음한 가수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는 징크스를 남겼다.

1969년 인기 절정의 순간에 갑자기 별이 된 차중락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더욱더 퍼져갔다. 1주기를 즈음해서는 대중음악사상 처음으로 요절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까지 제정되었다. 그해에 가장 뛰어난 남녀 신인 가수에게 주는 ‘낙엽상’의 1회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이었다. 심지어 1970년에는 그의 히트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과 같은 제목으로 그의 짧은 일생을 그린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더불어 차중락과 관련된 영화가 2편이나 동시 기획되는 충돌까지 일어났다.

차중락 사망 후 1969년 1월 많은 소녀팬들이 묘소를 찾는 모습.

차중락의 최대 라이벌은 신장염으로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로 급부상했던 배호였다. 1967년 ‘돌아가는 삼각지’로 스타덤에 오른 배호는 1970년까지 4년 연속 문화방송(MBC) 10대 가수에 선정되며 히트곡마다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는 전성기를 누렸다.

1971년 10월20일 방송된 MBC 음악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이다. 방송 후, 가을비를 맞아 감기 몸살에 걸렸던 배호는 11월7일 병세가 악화돼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회생할 수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 구급차 안에서 세상과 이별했다.

배호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인 11월8일. 라디오의 정규 뉴스 방송 시간에 배호의 노래가 흘러나와 청취자들은 방송 사고로 여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수협회장으로 치른 장례식 후 경기도 장흥의 장지로 향한 운구 행렬에는 많은 여성 팬이 소복을 입고 따라가 화제가 되었다. 현재 노래비가 없는 차중락과 달리 배호는 경기도 장흥의 묘소에 ‘두메산골’을 시작으로 서울 삼각지에 ‘돌아가는 삼각지’, 강원도 주문진에는 ‘파도’, 경주시 현곡에는 ‘마지막 잎새’ 등 8개의 노래비가 있을 정도로 여전히 팬이 많다. 가수 장사익은 “아무리 불러도 배호의 ‘필’을 못 좇아가겠다”며 그의 가창력을 극찬했다.

가수협회장으로 치러져 인산인해를 이룬 배호의 영결식장 1971년 11월.

배호 첫 노래비 두메산골(경기도 장흥묘소)와 유작 마지막 잎새(경주시 현곡면) 노래비 제막 2003년.

배호와 차중락에게는 노래 제목과 연관된 공통점이 더 있다. ‘가수는 자신의 노래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는 가요계의 속설에서 배호는 벗어나지 못했다. 드러머 출신의 무명 가수로 출발했던 배호의 데뷔곡 제목은 묘하게도 ‘굿바이’였다. 사망 직후에 발매된 유작의 제목도 이별을 암시하는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이었다. ‘0시의 이별'은 ‘통금인데 0시에 헤어지면 어떡하냐’는 이유로 방송 금지가 되기도 했다. 늘 병마와 싸웠던 배호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오히려 먼저 별이 되어버렸던 차중락도 마찬가지다. 그의 첫 히트곡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고 유작 또한 노래 제목에 낙엽이 들어간 ‘낙엽의 눈물’이다.

배호 유작 (1971년 11월15일 지구레코드).

1988년 11월22일 새벽에 남성 그룹 ‘강병철과 삼태기’의 리더 강병철은 행사를 마치고 봉고차를 타고 귀가하던 경인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 중이던 30대 경찰관의 승용차와 부딪히면서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발표한 삼태기의 음반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1992년 등장한 남성 힙합 댄스 듀오 ‘듀스’의 멤버 김성재는 타고난 춤꾼으로 그룹의 패션과 콘셉트를 담당했다. 그룹 해체 이후 1995년 컴백했던 23살 청년은 방송 출연 다음날인 11월20일 새벽에 호텔 방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처음 경찰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인을 발표했으나 타살 의혹이 제기되며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남겼다. 1995년 발매한 듀스의 마지막 정규 음반인 3집은 게이트 폴드 LP로 소량 제작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연예계 전체로 증폭되었던 ‘11월 괴담’과 관련해서는 11월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가 집중되면서 바쁜 일정과 심리적 이완 현상이 커진 탓에 긴장감이 풀려 사건 사고가 많다는 분석이 있었다. 또한 프로야구 등 중요 스포츠 시즌이 끝나면서 각종 언론이 연예 관련 뉴스로 관심을 옮기면서 사건들이 부풀려진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올 11월은 아무 사고 없이 지나가 모두가 한 해를 멋지게 정리하는 12월을 맞이하길 바란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