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걷자 인생 2막이 열렸다
[이인우의 서울&] 안정된 직업 박차고 여행가로 살아가는 박재희씨
등록 : 2016-04-21 16:33 수정 : 2016-04-25 10:19
뉴질랜드 밀퍼드 사운드 트레킹 여정을 담은 '숲에서 다시 시작하다'의 저자 박재희씨는 지금 에스파냐 산티아고 순례길 800㎞에 도전하고 있다. 사진은 7일째인 지난 7일 아조프라에서. 박재희 제공
27년간 업으로 삼은 세계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를 꼽으라면? “열정이 사라진 게 가장 크겠죠? 어느 날 보니까 내가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있었다. 재미있던 일이 언젠가부터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파국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 늦기 전에 세상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고 싶었다. 그 무렵 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영향을 미쳤다. 죽음을 생각하니 의외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여행가가 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여행의 본질은 멀리, 많이 다니는 게 아니라 일상과의 거리두기라고 생각한다. 난 늘 창의적 문제 해결, 자유롭고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 방법으로 여행만큼 좋은 게 없었다. 여행을 통해 걸러진 생각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의미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체력만 빼면 지금 나이대가 경험, 통찰, 이해 모든 측면에서 젊은 시절보다 낫다고 자부한다(웃음).” 박씨는 지금 에스파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숲에서 다시 시작하다>가 출판되기 무섭게 다시 ‘단독 군장’을 쌌다. 오랫동안 꿈꾸웠던 순례자의 길을 오롯이 혼자 걸어 보고 싶었다. 지금 걷는 곳은 당신에게 어떤 곳일까? “막연히 십년 전쯤부터 나이 쉰이 되면 꼭 걸어 보리라 생각했다. 800㎞를 혼자 걷는 것만큼 치열하게 인생을 돌아보는 방식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주로 하며 걷는가? “거창한 생각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걷는 동안 하는 생각은 얼마나 더 가야 화장실이 있고, 물병에 물을 채울 수 있을까? 오늘 밤 어디서 잘까? 알베르게(숙소)는 잡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지치는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등등 하루하루 가장 중요한 게 생리적인 문제들이다. 허무하지만 이건 진짜다.” 밀퍼드 트래킹과 산티아고 걷기를 인생에 비교한다면? “밀퍼드는 초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힐링과 리셋을 하는 걷기라면, 산티아고 길은 인생 그 자체 같다. 꼭 종교적인 고행이 아니라 해도 평균 5~6주가 걸리는 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무작정 그 시간을 걸으라고 한다면 다들 질색하지 않을까? 인생은 싫다고 살기를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인생을 닮았다고 말할 수밖에.” 돌아오면 무엇을 하고 싶어질까? “산티아고 길이 다 끝나고 날 때쯤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하지만 책을 내고 그냥 떠났기 때문에, 일단 책을 만들어 주고 아껴 준 분들과 만나는 자리를 먼저 갖겠다. 책 이야기, 산티아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 목표를 생각하며 걷는다.” 요즘 가장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가 있다면? “멋진 노인이 되기! 나의 진정한 야망이다. 어떻게 하면 남은 생애 30년을 남과 내가 도움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진짜 내가 하고픈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며 늙어 갈까이다.” 어쩌면 당신의 인생은 젊은 여성들의 로망일 수도 있다. 도움이 될 만한 말이 있다면? “그런 거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젊은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꼰대되는 첫걸음 같아서 싫다. 그 나이에는 절대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을 조언이라고 한다면 아마 나라도 화가 날 것 같다.” 인터뷰는 박씨가 3월27일 에스파냐로 출국하기 전에 한번 했고, 나머지는 카카오톡을 이용해 해 보기로 했다. 산티아고 노정에서 박씨는 기자와 몇 차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문자와 사진이 실시간으로 전송되면서 원거리 인터뷰임에도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다. 세계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할 일도, 꿈꿀 시간도 더욱 많아지고 있다. 여성들이여! 변화를 원한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인생 후반, 잃을 것은 갱년기뿐이다. <서울&> 콘텐츠디렉터 iwlee21@hani.co.kr